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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자가 불량배라는 게 분명해진 지금

입력 2026.01.08 19:57

맑은 개울에서 어린양이 물을 마시고 있었다. 그때 배고픈 늑대가 나타났다. 늑대는 어린양을 노려보며 말했다. “애송이가 버릇없이 내 물을 흐려놓다니 네놈은 벌을 받아야 한다!” 어린양이 답했다. “저는 당신이 계신 곳에서 스무 발자국이나 아래서 흐르는 물로 목을 축였습니다. 어떤 식으로도 당신 물을 더럽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네놈이 물을 흐려놓았어. 게다가 난 네놈이 작년에 나를 욕한 것도 알고 있어.” “작년에 저는 태어나지도 않았어요. 아직도 엄마 젖을 빨고 있는 걸요.” “네놈이 아니면 네놈 형이겠지.” “저는 형이 없는데요.” “그럼 네놈 종족 중 하나겠지. 네놈들이랑 목동들, 개들은 언제나 내게 불량한 말을 지껄여왔어. 이제 내가 되갚아줄 때다.” 늑대는 어린양을 숲속으로 끌고 가 잡아먹어버렸다. 재판도 하지 않고 말이다.

‘불량배 국가’란 표현 쓰던 미국
베네수 폭격하고 마두로 납치
유엔헌장·국제법 무시 ‘무법자’
세계 민주주의 위해 비판 마땅

17세기 작가 라퐁텐의 유명한 동화 <늑대와 어린양>이다. 라퐁텐은 이야기를 시작하며 “최강자의 이성이 항상 최고의 선이라는 점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강자가 항상 옳다는 걸 보여주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참고로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이 구절을 2000년대 초반 주권과 민주주의(‘도래할 민주주의’)를 새롭게 사고하는 책 <불량배들>의 제사(題詞)로 썼다. 그는 당시 국제정치에서 유행하던 ‘불량배 국가(rogue state)’라는 용어를 사고의 단초로 삼았다.

‘불량배 국가’는 미국이 일부 국가들을 향해 국제질서를 어지럽히고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며 테러집단을 후원하고 있다고 지목하며 쓴 용어이다. 첫 번째 어린양은 파나마였다. 1989년 미국은 파나마 정부가 마약을 밀매하고 정치적 반대자를 억압한다는 이유로 지도자인 노리에가를 납치해서 미국 법정에 세웠다. 누구는 전직 CIA의 정보원 출신인 노리에가가 미국의 ‘지저분한 일들’을 너무 많이 알고 있어서라고 했고, 누구는 파나마 운하의 통제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하지만 어떻든 명분은 마약 밀매와 민주주의 탄압이었다.

이후 이라크, 레바논, 북한, 쿠바, 이란 등이 목록에 올랐다. 도대체 기준이 무엇일까. 빌 클린턴 정부의 국가안전보장이사회 일원이었던 로버트 리트워크는 이렇게 말했다. “불량배 국가란 미국이 그렇다고 말한 모든 국가이다.” 그러니까 목록은 미국이 정한다.

지난 토요일 미국이 베네수엘라를 폭격하고 마두로 대통령을 납치하면서 한동안 보이지 않던 불량배 국가라는 표현이 돌아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미국을 향해서다. 미국의 러시다 털리브 의원은 소셜미디어에 “이런 일들은 불량배 국가나 하는 짓”이라고 썼다. 지난해 말 미국이 마약 운반선이라고 주장하며 카리브해를 지나던 선박들을 폭격해 수십 명을 살해했을 때, 영국 신문 가디언에는 “이제는 미국이 불량배 국가다”라는 칼럼이 게재되었다. 이 폭격을 두고 유엔 최고인권대표 폴커 튀르크는 ‘사법 외 살인(extrajudicial killing)’이라고도 불렀다.

유엔헌장은 국가의 영토나 정치적 독립을 침해하는 무력행위를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국제법상 자위권 행사가 가능한 경우는 무력 공격을 받았을 때나 전멸 위험에 처한 인구를 구출해야 할 때뿐이다. 미국 정부가 말하는 ‘마약 테러리즘’에 대한 자위권은 이 기준에 한참 미달한다. 게다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자위권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는 미국이 베네수엘라를 “운영하겠다(run)”고 했다. 또 애송이 마두로가 흐려놓은 베네수엘라의 검은 물(석유산업)도 장악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베네수엘라 침공 다음날에는 콜롬비아 대통령을 겨냥해 “마약공장을 운영한다”며 “그는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쿠바가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그야말로 네놈, 네놈 형, 네놈 종족이 다 문제라는 식이다.

이제 미국이 국제법 바깥에 있음이 분명해졌다. 미국은 무법자 국가이며 사실상 세계의 군주이다. 그것을 이제 알았느냐고, 원래 국제질서에서는 ‘힘이 곧 정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언뜻 보면 현실을 냉정히 분석하는 현실주의자 같지만 실상은 부당한 현실을 추인하는 냉소주의자들이다.

그러나 냉철한 이성이란 재빠른 순응이 아니라 비판적인 사고이다. 어린양이든 독재자이든 늑대가 제멋대로 끌고 가는 일이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 실효성을 따질 것 없이 미국의 국제법 위반을 강력히 비판해야 한다. 더 나아가 세계 최강자가 불량배임이 분명해지고 있는 지금, 늑대가 늑대를 자처하고 위험이 위험으로 가시화되고 있는 지금, 세계가 군주정으로 나아가고 있는 지금, 민주주의를 세계적 차원에서 고민하는 일이 우리에게 더욱 절실해졌다.

고병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고병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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