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현지시간) 이란 테헤란에서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는 가운데, 차량들이 불길에 휩싸여 있고 시위대들이 모여 있다. 이 사진은 소셜미디어 영상을 캡처한 것이다. 로이터 연합뉴스
이란 경제난에서 촉발한 반정부 시위가 2주째 접어들며 격화하는 가운데, 이란 당국이 시위대를 향해 실탄을 발포하며 강경 진압에 나서면서 사망자 수가 116명으로 급증했다. 시위 초기 진압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며 관망하던 이란 당국이 강경 진압으로 태세를 바꾼 데는 시위가 이란 전역으로 거세게 확산되면서 체제 존립마저 위태로울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작용한 탓으로 보인다. 이란 정권의 주요 지지층이었던 상인들의 주도하에 시작된 시위에 중산층·빈곤층까지 폭넓게 참여하며 정권에 등 돌리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시위 유혈진압을 빌미로 이란 공격 가능성을 시사하면서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으로 확립된 신정체제가 최대 위기를 맞이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시위 참여하면 사형”···시위대 향해 실탄 발포, 병원에 쌓인 시신
10일(현지시간) 미국에 기반을 둔 인권운동가통신(HRANA)에 따르면 이란 반정부 시위 관련 사망자는 최소 116명으로 늘어났으며 구금자 수는 2638명에 달한다. 사망자 수는 전날 기준 65명보다 크게 증가한 것으로, 이란 당국이 인터넷을 차단해 정확한 정보 파악이 어려운 상황에서 실제 피해 규모는 더 클 수 있다. HRANA는 사망자 대부분이 근거리에서 실탄이나 고무탄에 맞아 사망했다고 전했다. 사망자 가운데 37명은 군인·보안군·검사로 확인됐다.
시위가 이란 전체 31개주 185개 도시 총 574곳으로 확산되자 이란 당국은 강경 진압을 예고했다.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는 전날 시위대를 “공공기물 파괴자” “사보타주범”으로 칭하며 “일부 폭도들이 거리를 망치며 다른 나라 대통령(트럼프 대통령)을 기쁘게 하고 있다”고 말하고, 다음날 모하마드 모하메디아자드 이란 검찰총장은 “시위에 참여하면 누구든 신의 적으로 간주할 것”이라며 가담자가 사형에 처해질 수 있다고 경고한 이후 이란 당국은 시위대를 향해 실탄을 쏘며 대응 수위를 높였다.
인터넷과 통신 차단으로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기 어려운 가운데, 가디언과 CNN 등 외신은 시위 참가자들의 증언과 영상을 인용해 참혹한 현장 분위기를 전했다. 테헤란의 시위 참가자는 “저격수가 배치되고 도시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총에 맞았다. 수백 구의 시신을 목격했다”고 가디언에 전했다. 또 한 시위 참가자는 “군용 소총으로 무장한 보안군이 많은 사람들을 살해했다”고 CNN에 말했으며, 다른 시위 참가자는 “병원에서 시신들이 서로 겹쳐 쌓여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전했다.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가 9일(현지시간) 이란 테헤란에서 연설하고 있다. UPI연합뉴스
이란 보수층·빈곤층까지 가담한 시위···신정체제 치명적 위협
이번 지위는 지난달 28일 이란 리알화 가치가 폭락, 1달러당 145만리알까지 급락하며 사상 최저치를 기록하자 이란 경제 중심지인 테헤란 그랜드바자르(전통 시장) 상인들이 가게 문들 닫고 거리로 쏟아져 나오면서 시작됐다. 이란 정권의 주요 지지층인 상인들의 주도하에 시작된 시위가 대학생, 빈곤층까지 확산되면서 2022년 히잡 착용 반대 시위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로 번지고 있다. 지난해 6월 이스라엘·미국이 이란을 공습한 이후 유엔이 대이란 제재를 복원하면서 이란은 화폐가치가 폭락하고 물가가 급등하며 경제난에 시달려왔다.
2022년 ‘여성·생명·자유’ 운동으로 알려진 히잡 반대 시위는 사회 억압에 대한 이란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지만 가난하고 보수적인 이란인들의 참여를 이끌어내진 못했다. 하지만 경제적 고통에서 촉발된 이번 시위는 빈곤층과 중산층 모두가 거리에 나서게 만들면서 이란 정권에 치명적 위협이 되고 있다고 뉴욕타임스(NYT)는 지적했다. 이란 리알화 폭락과 인플레이션으로 이란인들의 소득은 과거의 3분의 1~4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든 상황이다.
싱크탱크 ‘보르스 앤 바자르 재단’의 에스판디야르 바트망헬리드지 대표는 이번 시위가 시장 상인들로부터 시작됐다는 점이 상징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다며 “이들은 1979년 이란 이슬람혁명으로 이끈 시위를 촉발한 주역들”이라고 지적했다. 또 시위를 조직하려면 네트워크와 시위에 참여할 여력이 있어야 한다며 “시장 상인들은 다른 사회 집단과 달리 모두 함께 가게 문을 닫고 거리로 나설 수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고 덧붙였다.
상인들의 시위는 곧 “이란에 자유를!”이라는 구호를 외치게 됐고,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독재자에게 죽음을! 하메네이에게 죽음을!”이란 반정부 구호로 확대됐다.
이란 정권은 시위가 확산되자 지난 5일 8000만명 이란 국민에게 매달 1인당 100만토만(약 7달러·1만원) 지급하겠다는 유화책을 내밀고 마수드 페제시키안 이란 대통령이 국민들의 고통에 공감을 표하고 중앙은행장을 교체하면서 시위대 달래기에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이에 이란 당국이 본격적 폭력 진압에 돌입하면서 사태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EPA연합뉴스
트럼프 “이란 아픈 곳 매우 세게 때릴 것” 이란 군사 공격 검토···내우외환 이란정권
이런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 시위 유혈 사태를 빌미 삼아 눈엣가시인 이란 정권을 겨냥한 군사작전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NYT와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에 대한 대규모 공습을 포함한 공격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보도했다.
NYT는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에 가할 새로운 군사타격 선택지를 최근 며칠 보고받았으며 아직 최종 결정을 내리진 않았지만 이란 정권의 시위 탄압에 대응해 타격을 승인하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고 전했다. WSJ 또한 미 행정부가 이란 공격 방안을 두고 예비적 단계의 논의를 진행해왔으며, 선택지 중 하나에는 이란 군사 표적을 겨냥한 대규모 공습도 포함돼 있다고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 시위 격화 이후 시위대 유혈 진압시 미국이 군사적 개입을 할 수 있음을 시사해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트루스소셜에 “이란은 아마도 그 어느 때보다 자유를 목전에 두고 있다. 미국은 도울 준비가 돼 있다”며 “아픈 곳을 아주 세게 때릴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지상군 파병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덧붙였다.
이란 정권이 반정부 시위와 미국 공격 위협이라는 초유의 내우외환 위기에 처한 가운데, 1979년 이란 이슬람혁명으로 축출된 팔레비 왕조의 마지막 왕세자 레자 팔레비의 귀환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시위대 일부에서 나오고 있다. 그간 이란 반정부 시위에서 무너진 팔레비 왕조 복귀 요구를 내건 구호는 거의 없었기에 이례적이란 평가가 나온다. 레자 팔레비는 소셜미디어에 시위대를 지지하고 참여를 독려하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이는 레자 팔레비에 대한 지지라기보다는 현 이란 정권에 대한 불만이 무너진 왕조에 대한 향수를 일으킬 정도로 높아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NYT는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