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대란’은 공식적으로 종결되었지만 흉흉한 소식은 좀처럼 잦아들지 않고 있다. 이른바 필수의료 현장에서 일하는 의사들은 상황이 악화일로에 있으며 의료체계가 붕괴하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비관적 전망을 쏟아내고 있다. 방향에서는 차이가 있을지언정, 기존 의료체계에 상당한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만큼은 많은 이들이 동의하고 있다. 대체로 당장 생명을 위협하는 중증 혹은 응급의료 문제, 그렇기에 병원, 그것도 고난도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종합병원, 의료인력도 고도의 스페셜리스트, 즉 특정 영역에 전문화된 분과 전문의들이 정책적 관심 대상이다. 하지만 크고 화려한 건물도 일단은 탄탄한 기초공사로부터 시작되는 것처럼, 병원체계는 1차 의료의 뒷받침 없이 작동할 수 없다는 점이 자주 간과된다.
‘의료대란’ 끝났지만 현장은 혼란
한국의 관심은 병원 정책에 집중
전 세계서 ‘포괄적 1차 의료’ 작동
지속 가능한 의료체계 생각해야
사실 한국은 병원과 의원의 기능 구분이 모호하고, 정부 정책이든 환자들의 관심이든 대체로 병원에 집중되어 왔다. 하지만 의료서비스 접근성, 지역 격차, 의료인력 부족 등에 대한 해외 연구나 정책들은 한국과 달리 주로 1차 의료에 초점을 둔다. 병원은 외래가 아닌 입원 치료를 받는 곳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1년에 한 번 입원하는 일도 사실 드물기 때문에 집에서 아주 가깝지 않아도 된다. 응급실 이용도 그렇게 자주 있는 일이 아니고 어차피 구급차를 이용하기 때문에 골든타임을 확보할 수 있는 정도의 거리에만 있으면 된다. 중증·응급의료 서비스일수록 거점에 자원을 집중하는 것이 의료의 질이나 자원 활용의 효율성 측면에서 더 낫다. 다만 병원체계가 이렇게 돌아가려면 지역에서 일상적으로 다양한 건강 문제를 예방·치료·관리하고 문제가 생길 때 병원에 의뢰할 수 있는 체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의료자원의 배치에 대한 정책이나 연구도 1차 의료에 관심을 기울인다.
‘병원’이 시작된 서구 사회에서 ‘hospital’은 치료의 공간이 아니라 손님, 순례객을 맞이하거나 가난한 사람들을 수용하는 장소였다. 환대나 접대를 의미하는 ‘hospitality’와 어원이 같다. 진료는 의사가 환자의 집을 방문해 제공하는 것이 기본값이었다. 20세기 초반을 지나 항생제, 마취, 수혈 같은 기술이 발전하고 치료다운 치료가 가능해지고 나서야 병원은 비로소 의료 제공의 중심 공간이자 수련의 장소가 되었다. 현대의 병원은 의학 발전의 힘을 보여주는 상징적 공간이지만, 병원체계가 고도화되고 복잡해질수록 그에 동반해 1차 의료의 중요성도 커졌다.
특정 ‘질병’에 대한 전문적 치료만큼이나 그러한 문제들을 가진 ‘사람’에 대한 전인적 접근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질병의 예방, 관리, 재활과 돌봄 같은 문제는 특정 질환과 치료에 특화되고 세분화된 병원 서비스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다. 1차 의료는 환자들이 복잡한 의료체계를 헤쳐나가도록 도와주는 나침반이자 문지기 역할을 맡는다. 그런데 의사 혼자 이 역할을 할 수는 없다.
환자의 건강문제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생활 습관에 대한 적절한 조언을 제공하고 관리하며, 때로는 가정방문을 하거나 사회서비스를 연계해주고, 때로는 입원치료를 의뢰한 병원 의료진과 치료계획과 퇴원 후 관리계획을 함께 논의해야 하는데, 이 모든 것을 의사 혼자 어떻게 하겠는가.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영양사, 물리치료사 등 여러 분야의 스태프들이 ‘팀’으로 일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세계 여러 곳에서 다양한 형태의 포괄적 1차 의료 서비스 체계가 작동하고 있다. 국가가 직접 운영하는 공공기관인 곳도 있고, 비영리 민간단체가 정부 지원을 받아 운영하는 곳도 있다. 한국이라고 못할 이유는 없다. 다양한 정책 실험을 해보고 국내 여건에 맞게 보완하면 된다. 가장 큰 걸림돌은 어쩌면 사회적 인식이다. 정책결정자, 의료전문가, 환자들의 머릿속에는 온통 병원뿐이다. 제대로 된 ‘포괄적 1차 의료’를 경험해본 적이 없으니 요구하는 목소리 자체가 작다.
코로나19로 큰 타격을 받았던 이탈리아는 이후 감염병 전문병원을 육성하기보다 1차 의료를 강화하고 지역공공병원과 연계하는 의료개혁 전략을 채택했다. 공중보건 위기 대응에서도 1차 의료의 역할이 중요했다는 평가 때문이다.
우리 사회도 이제는 ‘병원 너머’를 상상해야 한다. 1차 의료를 고려하지 않는 병원 중심의 의료정책은 철근이 빠진 채로 건물을 더 높고 더 화려하게 짓는 것과 다름없으며, 이는 안전하지도 지속 가능하지도 않다.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운영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