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위 ‘전문가 설문조사’ 보고서
‘관련 법 제도 미비’도 걸림돌 꼽아
“대통령 직속 ‘총괄 기구’ 설치해야”
한국이 유엔 인종차별철폐협약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이유로 ‘정부의 의지 부족’ ‘칸막이 행정’ 등을 꼽은 연구 결과가 나왔다. 연구진은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과 국제인권조약 이행을 상시 점검하는 국가기구 설치 등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11일 국가인권위원회의 연구용역 보고서 ‘인종차별철폐협약 권고 이행 현황 분석 및 이행 강화 방안’을 보면 연구진은 지난해 7~8월 국내 인종차별철폐협약과 관련한 전문가 21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법률가 3명, 활동가 5명, 공무원 3명, 연구자 10명이 설문조사에 참여했다. 관련 정책을 담당하는 공무원 5명을 대상으로는 심층 인터뷰를 하고 협약 이행에 어떤 걸림돌이 있는지 분석했다.
설문조사 결과 21명 중 14명은 ‘정부의 이행 의지가 부족해서 국제 인권 조약이 국내에서 이행되지 못하고 있다’고 답했다. 유엔 인종차별철폐위 등이 차별금지법 제정 등을 반복적으로 요구했지만 정부가 이를 이행하려는 의지가 없었다고 지적했다.
17명은 ‘법 제도 부재·미비’를 걸림돌로 꼽았다. 헌법은 ‘국제협약 등은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진다’고 명시한다. 하지만 이 보고서를 보면 국내 판결문 등에서 인종차별철폐협약이 언급된 경우는 1979년부터 2019년까지 3건에 불과했다.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포괄적 차별금지법과 인종차별을 처벌하는 법 등이 없다는 점도 지적됐다.
현장 공무원들은 협약 이행 관련 업무가 법무부·외교부·노동부·성평등가족부 등 여러 부처에 흩어져 있는 점을 문제로 들었다. 각 부처가 파편적인 대응만 해 전체적인 인종차별 실태를 파악하기 어려운 구조라는 것이다. 인종차별 실태 파악 통계나 모니터링 자료가 제대로 생산되지 않고 있는 문제도 제기했다.
‘조직적 반대 여론’으로 인해 담당 공무원들이 소극적으로 일한다는 얘기도 나왔다. ‘이슬람 사원 건설 반대’ 등 인종차별적 내용의 민원 등이 조직적이고 반복적으로 들어오는 경우가 계속되다 보면 공무원이나 정책결정자들이 전체 국민 의견보다 더 큰 목소리로 나타나는 반대 의견에 더 기울게 되는 현상도 있다고 했다.
연구진은 이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국제인권조약 이행을 총괄·조정하는 대통령 직속 상설 기구 설치 등을 제안했다. 연구진을 이끈 김철효 경상국립대 사회학과 교수는 “최근 발생한 고 뚜안씨 사건 등은 한국에 거주하는 이주민이 겪는 문제를 집약적으로 드러냈다”며 “인종차별철폐협약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이주민이 우리 사회의 변화 과정 속에 초빙된 새로운 사회 구성원이라는 관점으로 이민정책 전반을 점검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한국은 지난해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의 심의를 받았다. 2018년 이후 처음이다. 유엔 인종차별철폐위는 세계 각국이 인종차별철폐협약을 잘 이행하고 있는지 정기적으로 점검한다. 지난해 4월 한국 정부의 이행계획 등을 심의했고, 그 결과 지난해 5월 한국 정부가 지키지 못하고 있는 협약 내용에 대해 보완하라고 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