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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원짜리 하도급 계약서

입력 2026.01.12 20:01

수정 2026.01.12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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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발전소 정비업무를 수행하는 공공기관 한전KPS의 하청업체 노동자 8명이 노동조합에 도움을 요청했다. 하청업체가 이들을 해고하고 임금을 착복했기 때문이다. 한전KPS와 하청업체가 작성한 산출내역서를 확인해보니 하청업체의 이윤은 0원이었다. 계약을 따내기 위해 도급비를 최저가로 적어낸 결과다. 그렇다면 하청업체는 무엇으로 먹고 살까? 원청이 하청노동자의 인건비로 지급하라고 준 ‘노무비’에서 이윤을 챙긴다. 공공기관의 이윤 0원짜리 하도급 계약서는, 노동자에게 가야 할 돈을 하청업체가 가로채는 것을 용인하겠다는 약속이다.

이번에 노동자들을 해고한 하청업체는 안전 인력을 추가 배치하기 위해 추가 인건비가 필요하다며, 기존 임금을 삭감하겠다고 노동자들에게 일방 통보했다. 그러나 새로 배치된다는 안전 인력은 산업안전 관련 자격증조차 없었다. 노동자들이 반발하자 업체는 전원 계약 해지를 통보했다. 하청업체는 경쟁력 강화나 산업안전보건에 대한 책임을 질 능력도 의지도 없이 오직 인건비 착복만을 목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해관계자를 제외하면 발전 사업에 종사하는 그 누구도 이런 비효율적인 구조에 찬성하지 않을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과 주무 부처인 기후에너지환경부 김성환 장관도 문제의 심각성을 알고 있다. 지난해 12월17일 업무보고에서 이 대통령은 “국가 공공영역에서 가혹하게 노동자를 학대해 근로조건을 악화시켜서 산재 사고로 사람이 많이(인명 피해) 발생한다든지 잔인하게 임금 착취가 벌어진다든지 그런 건 안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TV 속 이 대통령은 위험의 외주화를 막겠다고 말하지만, TV 밖 발전소 현장의 시계는 거꾸로 흐른다. 0원짜리 계약서는 2018년 김용균 비정규직 노동자가 태안화력발전소에서 홀로 일하다 죽은 뒤 알려진 계약서이기도 하다. 당시 문재인 정부도 최저낙찰제 문제를 개선하겠다고 약속했지만 8년이 지나도록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그 결과 지난해 6월2일, 김용균이 사망한 태안화력발전소에서 한전KPS 하청노동자 김충현이 또다시 목숨을 잃었다. 사고 이후 다단계 하청구조가 다시 도마에 올랐지만 반년 만에 발견된 것은 정부 대책이 아니라 0원짜리 계약서였다. 게다가 한전KPS는 하청노동자들을 직접고용하라는 법원 판결도 고용노동부의 시정명령도 이행하지 않고 있다. 이 덕분에 대통령의 말에 기대를 품었던 하청노동자들은 일터에서 ‘헛꿈 꾸지 말라’는 조롱을 받으며 하루하루 버티고 있다. 이는 공공기관 하나 통제하지 못하는 이재명 정부에 대한 조롱이기도 하다.

김충현 사망 사고 재발방지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정부와 고 김충현 대책위의 논의가 끝나기 전까지 한전KPS 하청노동자들의 고용을 보장하겠다는 정부 약속에 따라 8명의 노동자들은 계약 해지 대신 계약 연장을 받았다. 이들을 포함한 한전KPS 하청노동자들의 계약 만료일은 오는 3월31일이다. 청와대 앞 혹한 속에서 침낭 하나에 의지한 채 한전KPS 하청노동자, 고 김충현의 동료 김영훈과 국현웅의 노숙농성은 60일이 돼간다. 노동자들의 정당하고 절박한 외침과 ‘공공기관부터 위험의 외주화를 막겠다’는 대통령의 말이, 0원짜리 계약서보다는 힘이 있기를 바란다.

박정훈 민주노총 공공운수 노조 부위원장

박정훈 민주노총 공공운수 노조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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