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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빚진 존재들의 공동체, 한강과 계엄령

입력 2026.01.12 20:12

수정 2026.01.13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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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채의 인/문학 현장]서로 빚진 존재들의 공동체, 한강과 계엄령

2024년 12월은, 시민들이 어떻게 서로에게 빚진 존재가 되고 과거와 현재가 만나 어떻게 빛나는 공동체가 되는지를, 그것이 공동체 형성의 본원적 모습임을 문학과 현실에서 동시에 확인하게 됐던 순간으로 기록될 것이다

1.

김연수 소설가가 신작 창작 과정을 밝히는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다. 작품이 나오게 된 힘든 과정을 알 수 있었다. 지난달 서울대 비교문학 세미나에서였다. 2024년 12월3일의 계엄 사태 이후로, 제대로 된 소설 작업에 집중하기 힘들었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틈만 나면 휴대폰으로 새로운 소식을 확인하면서 가슴 졸이고 분노했던 것은, 그만이 아니라 아마도 최근 1년간 우리나라 시민들 대다수에 해당하는 것이었겠다.

계엄 난동 7일 후인 2024년 12월10일에는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시상식이 있었다. 두 달 전 10월10일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은, 바야흐로 힘을 받고 있던 ‘K문화’의 화룡점정과도 같아서, 문학계만이 아니라 나라 전체의 커다란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계엄 난동은 이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격이었으나, 역설적이게도 그로 인해 오히려 한강의 작품은 빛을 발했다. 한 맑은 영혼이, 서로 빚진 존재들의 공동체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문학 작품으로 그려내고 있었던 까닭이다. 한강이 노벨 문학상 강연문에서 썼던,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을까?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을까?”라는 문장의 울림이 컸던 것은, 과거와 현재의 도치가 주는 긴장감도 그러하지만, 무엇보다도 과거와 현재가 하나가 되는 장면을 많은 사람이 광장에서 확인했던 때문이기도 했다.

2.

한강의 문학은 한국문학사의 새로운 벡터 위에서 출발했다. 근대 이후 한국문학이 만들어낸 고유의 방향성은 1987년 체제 성립 이후로 변곡점이 만들어져 1990년대 이후의 문학으로 이어진다. 한강은 이 새로운 흐름 속에서 출발했으면서도 다시 한번 방향을 거슬러간다. 장인서사에서 시민서사로의 옮겨감, 작품으로 보자면 <검은 사슴>(1998)과 <채식주의자>(2007)에서 <소년이 온다>(2014)와 <작별하지 않는다>(2021)로의 이행이 그것이다.

우리 시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세 가지 활동을 하면서 산다. 밥벌이를 위한 노동, 자기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 공들이는 작업, 그리고 공동체의 주권자로서 공적 행위를 한다. 이 셋은 고대의 용어를 빌리자면 노예와 장인과 시민의 일이되, 우리 시대 사람들은 셋 모두를 해야 한다. 작가나 예술가도 마찬가지다. 자기 자신을 위한 노예이고 자기 직업의 장인이며 또한 주권자 시민이다. 한국문학은 지난 백 년 동안 주로 세 번째, 시민의 영역에 뿌리를 내린 채로 성장해왔다. 문학은 공동체 전체의 공적 관심을 위한 매체이고자 했고, 그런 점에서 사회적 존중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사실은 역으로 지난 백 년 동안 한국인들이 직면해야 했던 역사적 현실이 얼마나 힘든 것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민주화 이후 세대로서 1990년대에 작품 활동을 시작한 한강은, 사회적 관심보다는 보편적 인간 조건에 대한 재현과 예술적 완성도에 주안점을 두는 세계를 구축해왔다. 첫 장편 <검은 사슴>에서 볼 수 있듯이, 보통 사람들이 지닌 욕망의 세계조차 버텨낼 수 없는 순수한 영혼의 이야기가 핵심에 있다. 한강의 이런 작풍은 오랜 시간 유지되어, 국제적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채식주의자>로 이어진다. 그런데 그런 그가 광주항쟁을 다룬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를 냈다. 이것은 이색적이다 못해 난데없다는 느낌까지 주었다. 한강은 제주 4·3참사를 다룬 <작별하지 않는다>를 냄으로써 그것이 우발적인 것이 아님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었다. 그리고 썼다.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을까.”

3.

계엄 사태 당일 여의도에서 계엄군과 대치했던 한 30대 여성은, 사흘 후인 2024년 12월6일 한 방송에서 이렇게 말했다. 민주화운동을 경험하지 못했던 세대인 나는, 계엄 사태를 겪으며 선배 세대에게 빚을 졌다는 생각, 태어나서 당연하게 누려왔던 자유가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힘든 경험을 한 선배 세대가 거리에 나와 함께해준 것에 대해 감사한다고 눈물을 글썽였다. 토요일엔 광장에 많이 모여서 탄핵 표결을 만들어내자고 덧붙였다.

다음날인 12월7일 토요일, 국민의힘 의원들의 궐석으로 탄핵 표결이 무산되던 날, 광장의 시위에 참가했던 한 ‘선배 세대’ 60대 남성은 그날의 경험을 이렇게 회고했다. 탄핵을 하지 못한 국회의 상황에 분노와 실망감을 주체하지 못했고, 이제는 우리나라가 나락으로 간다고 생각하여 절망스러웠다, 무거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돌리고 있는데, 실망하지 말라고 노래하고 춤추는 젊은이들이 보였다, 그들을 보자 가슴이 벅차 눈물이 났다고, 우리에게도 아직 희망이 있다고, 내 희망을 그들에게 빚졌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눈물을 글썽이는 이 둘을 겹쳐놓으면, 과거와 현재가 서로에게 빚을 졌다고 말하고 있는 특이한 장면이 된다. 아무도 빚 갚기를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은 스스로 빚을 졌다고 느낀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한강의 <소년이 온다> 에필로그에는, 광주항쟁 당시 마지막 날까지 총을 쥔 채 도청을 지켰던 사람들의 육성 기록이 나온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총을 받기만 했을 뿐 쏘지 못했다. 패배할 것은 알면서 왜 남았냐는 질문에, 살아남은 증언자들은 모두 비슷하게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작가는 덧붙인다. “그들이 희생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 오해였다. 그들은 희생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남았다.”

그들이 희생자라면 그 자리에 없었던 사람들은 그들에게 빚진 존재가 된다. ‘현재가 과거를 돕고,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하는 것’은 그 빚을 갚는 행위가 된다. 하지만 그들이 스스로를 희생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사정은 오히려 정반대가 된다. 빚을 진 것은 오히려 과거가 된다. 빚도 없는데 빚을 갚겠다는 현재를 향해 과거는 말한다. 나는 그저 나의 일을 했을 뿐이다, 그것을 빚으로 알고 갚으려는 당신들의 행동이 고맙다, 그러니까 빚을 진 것은 나다, 장차 생겨날 빚을 내가 미리 갚겠다.

‘과거가 현재를 돕고,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한다’는 것은,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미리 행해진 빚 갚음의 행위가 된다. 그렇게 이들은 서로, 자기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빚을 주고받은 사이가 된다. 스스로 빚진 존재들, 서로 빚진 존재들의 공동체가 된다.

4.

죽음의 시선으로 삶을 보는 것이 문학과 예술의 일이다. 죽음의 시선으로 보면, 평범하고 당연한 삶이 유일무이하고 반복불가능한 고유성의 아우라가 된다.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는 삶과 죽음이 한데 어우러지는 매우 특별한 순간을 담아낸다.

소설 전체를 압도하는 것은 제주도 중산간 지역에 내리는 폭설의 풍경이다. 그 안으로 한발 들어가면, 죽은 자의 차가운 ‘뺨에 붙어 녹지 않는 눈’의 심상이 웅크리고 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제주 4·3참사로 인해 참혹하게 살해당한 여덟 살 막내 여동생의 기억과 대구 형무소에서 행방불명된 채 시신도 수습하지 못한 오빠의 흔적이 있다. 그 기억을 품고 있던 여성이 치매 노인이 되어 몸으로 말한다. 내 피붙이들의 장례를 치러주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작가는 영매가 되어 이들을 위해 뒤늦은 장례식을 치른다. 소설은 말한다. 당신들 때문에 오늘의 우리가 있다고.

2024년 12월, 깊고 어두운 밤이 되자 홀로였던 마음의 빚들이 서로를 향해 다가서기 시작했다. 빚진 사람들이 한데 모이자 빛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 빛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다시 빚진 마음이 되었다. 아무도 빚 갚기를 요구하지 않았는데 나는 빚졌음을 느낀다. 모두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우리는 서로에게 빚졌음을 느낀다. 2024년 12월은, 시민들이 어떻게 서로에게 빚진 존재가 되고, 과거와 현재가 만나 어떻게 빛나는 공동체가 되는지를, 그것이야말로 공동체 형성의 본원적 모습임을, 문학과 현실에서 동시에 확인하게 되었던 순간으로 기록될 것이다.

▲서영채
서영채 문학평론가

서영채 문학평론가


문학평론가. 서울대학교 아시아 언어문명학부 및 비교문학 협동과정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94년 계간 ‘문학동네’를 창간하여 2015년까지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한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를 지냈다. 한국 문학과 세계 문학, 인문학에 관한 글을 쓴다. <동아시아 비교문학> <우정의 정원> <왜 읽는가> <풍경이 온다> <죄의식과 부끄러움> <인문학 개념정원> <미메시스의 힘> <아첨의 영웅주의> <문학의 윤리> <사랑의 문법> <소설의 운명>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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