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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 sorry’ 없는 쿠팡, 다음 전쟁은 또 찾아온다

입력 2026.01.14 20:10

한국인이 미국에서 운전대를 잡으면 꼭 주의하라는 말이 하나 있다. “교통사고가 나더라도 먼저 I’m sorry라고 말하지 말라.” 상식적으로 죄송하다는 말이 먼저 나갈 수 있지만 미국에서 ‘I’m sorry’는 법적 책임을 인정하는 언사로 해석될 수 있다는 조언이다. 위기 상황에선 사과보다 법적 방어를 우선시하는 문화라는 뜻이다.

지난해 11월18일 쿠팡의 개인정보 유출 사태가 알려진 뒤 지난 두 달간 보인 태도가 딱 그렇다. 잘못했다고 먼저 고개 숙이지 않는다. 정보 유출을 ‘노출’이라고 표현한 점이 대표적이다. 지난해 말 국회에서 열린 청문회는 그 절정이었다. ‘법적으로 따져보라’는 쿠팡 태도는 무성의했다. 먼저 쿠팡과 법적 소송이나 행정 처분으로 맞서본 정부 측 인사들은 일찌감치 쿠팡의 이 같은 태도를 경험해봤다고 한다. 쿠팡은, 김범석은, 철저히 미국식 법무 중심의 위기 대응을 하고 있다. 이 방식은 쉽게 바뀔 리 없다. 그렇다면 대응 방식을 바꿔야 하는 건 우리다.

플랫폼 기업 힘 갈수록 커가는데
독과점 등 통제할 국내 제도 미흡
‘탈팡’도 대체재가 확실해야 효과
정부가 법 기반 확실히 다져야

쿠팡 사태는 역설적으로 한국 사회의 민낯을 드러낸다. 한국인 3400만명 개인정보 유출이라는 집단 피해가 발생해도 소송에 참여한 일부만 어렵게 소송을 벌여야 하는 구조다. 집단소송 제도가 필요한 이유다. 피해 사실에 대한 입증 책임 역시 정보 접근성이 떨어지는 개인이 아니라 기업이 부담하도록 서둘러 바꿔야 한다.

플랫폼 기업의 힘은 커졌으나 이를 통제할 제도는 한참 뒤처져 있다. 지난 한 해 쿠팡 물류센터와 배송 현장에서 사망한 노동자만 8명이다. 특정 기업의 특정 현장에서 이처럼 반복적으로 사망사고가 발생했다면 우연이 아니다. 구조적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새벽배송 기사는 지금도 노동자인지 개인사업자인지 불분명하다. 배송 시간과 물량을 플랫폼이 통제하고 있어 근로자로 인정될 수도 있다. 법적 지위가 명확하지 않은 셈이다. 플랫폼 노동자의 지위와 노동환경을 둘러싼 제도적 보완이 필요한 이유다.

독과점 지위를 누리는 플랫폼 사업자의 자사 우대, 끼워팔기, 최혜대우 요구 등을 규제하는 장치도 미흡하다. 현행 공정거래법으로는 시장지배자 위치에 있는 온라인 플랫폼을 명확하게 규율하기가 쉽지 않고, 과징금 수위도 낮은 편이다. 온라인 플랫폼 독과점 규제법의 필요성을 말해준다.

사실 쿠팡에 가장 단기적 타격을 줄 수 있는 건 이른바 ‘탈팡’이다. 쿠팡 불매운동은 벌써 세번째다. 2019년 쿠팡이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이 주도하는 비전펀드 투자로 성장한 회사라는 이유로 일본 제품 불매운동 차원에서 대상이 됐다. 2021년 경기 이천 물류센터 화재 당시 소방관이 숨진 지 5시간 만에 김범석이 한국 쿠팡의 모든 직위에서 물러난다고 알린 때도 불매운동이 확산됐다. 당시 회사는 이전에 결정된 사항이라고 했으나 사망사고가 일어났는데도 사임 소식을 전했다는 점에서 논란이 컸다.

불매운동이 성공하려면 대체재가 확실해야 한다. 남양유업 불매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지고 매출 감소라는 타격을 줄 수 있었던 이유는 진열대에서 대체품을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쿠팡이 6조원 넘게 들여 구축한 물류센터는 이제 사회 인프라가 됐다는 말까지 나온다. 국내 대형 유통업체가 쿠팡만 한 배송 물류망을 갖추지 못하고 심야영업을 못한다는 현실을 고려하면 ‘탈팡’이 얼마나 이어질지, 얼마나 타격을 줄지 냉정히 말해 물음표가 찍힌다.

결국 정부 역할이 중요하다. 지난해 12월31일 정부는 밤늦게 이례적인 보도자료를 하나 냈다. 국회 6개 상임위원회의 합동 쿠팡 청문회 직후였다. 국무조정실 등 12개 부처가 참여한 쿠팡 사태 범정부 TF는 “(쿠팡 위법행위를) 절대 좌시하지 않고 법적으로 가능한 모든 방안을 강구해 조치하겠다”고 밝혔다. 12곳이나 되는 정부 부처가 한 기업을 향해 강도 높은 경고 메시지를 내는 일은 극히 드물다. 의지를 다지는 건 환영하지만 엄포에 그칠까 우려된다. 치밀하게 준비해 실질적 제재를 가하고, 재발을 막을 필요한 법적·제도적 기반까지 다져야 한다.

혹여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할 수도 있다. 우리는 김범석과 쿠팡, 또 다른 ‘쿠팡’을 언제든 다시 마주할 수 있다. 그때 필요한 건 의지와 호소가 아닌 법과 제도라는 무기다. 지금은 다음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

임지선 경제부장

임지선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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