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바이벌 프로그램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승패가 명확히 갈리는 스포츠에는 열광한다. 기록과 점수로 증명되는 세계는 깔끔하고 공정하니까. 참가자들이 각자의 노래를 부르며 축제처럼 즐기는 가요제도 괜찮다. 하지만 음악이나 요리처럼 주관적인 영역에서 ‘과제’를 내주고, 우열을 가려 누군가를 탈락시키는 과정은 어딘가 불편하다.
기존의 음악 경연 예능들도 별 감흥이 없었다. <나는 가수다> <불후의 명곡>처럼 이미 잘 알려진 이들이 나와 펼치는 가창력 대결은 화려한 쇼의 한 장면일 뿐이다. 누군가의 노래를 재해석하는 것이라면 잘 만들어진 리메이크 음원을 듣는 것으로 충분하다. 굳이 그들을 무대에 세워 점수를 매기는 광경을 지켜볼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런데 지난 1월6일 막을 내린 <싱어게인 4>에는 빠져들었다. 이곳의 무대 위에 선 이들은 이름 대신 번호로 불린다. 단지 호명을 위한 기호가 아니다. 그들은 ‘무명’이라는 익명성에 갇혀 있던 가수들이다. 한때는 찬란한 인기를 누리다가 잊힌 이, 음반을 냈으나 아직 세상이 알아보지 못한 이, 수십년간 작은 무대만을 지켜온 이들. 10대부터 50대까지, 그들의 번호 뒤에서는 저마다의 간절하고 뜨거운 삶의 궤적이 있다. 번호로만 불리다가 탈락하는 순간 비로소 호명되는 그들의 진짜 이름을 들으면서, 나는 묘한 전율을 느꼈다. 세상이 제대로 불러주지 않았던 이름을, <싱어게인>은 정중하고 극적인 방식으로 다시 불러준다.
jtbc <싱어게인4> 의 한 장면.
젊은 가수들의 화려한 재능을 보는 일은 경이로웠다. 그들의 미래가 자연스레 궁금해졌다. 그리고 40대와 50대, 중년의 나이가 되어서도 여전히 무명인 이들의 단단한 노래를 듣는 일은 슬픔이었다. 직업란에 가수와 아파트 경비를 함께 적은 가수의 노래는 차분하고 알찼다. 표정은 평온했다. 십수년 넘게 라이브 카페에서 타인의 노래를 부르며 생계를 이어온 가수의 노래는 여전히 힘차고 강렬했다. 그들에게 <싱어게인>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무대라기보다 처절하게 빛나는 생존 신고의 장이었다.
하지만 무대는 언제나 축제여야 한다. 50대의 펑크록 가수 둘이 모인 팀 ‘폭풍 경보’의 공연은 한없이 흥겨웠다. 무거워진 몸이지만 마음은 깃털처럼 가볍게, 생애 첫 무대인 것처럼 순수한 즐거움을 폭발시켰다. 그들에게 탈락이나 패배는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사랑하는 음악을 한껏 즐기며 퍼포먼스를 펼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웃음은 천진했고, 발걸음은 경쾌했다. 경쟁에 매몰되어 예술의 본질인 ‘희열’을 때로 잊어버리는 우리에게 그들의 공연은 신선한 충격이고, 순수한 환희였다.
‘싱 어게인(Sing Again).’ 제목 그대로 ‘다시 부르는 노래’이자 ‘다시 주어지는 기회’에 관한 이야기다. 예술에 순위를 매기는 잔인함을 <싱어게인>은 ‘기억’과 ‘기회’라는 다정함으로 감싸안는다. 그들의 경쟁은 적을 누르고 높은 순위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잃어버린 자신의 이름을 되찾고 세상과 다시 연결되기 위한 치열한 몸짓이다. 자신의 스토리와 노래를 들려주고 무대를 내려오면, 그들은 익명의 번호가 아닌 자신의 이름을 되찾는다.
한국에는 유독 ‘원 스트라이크 아웃’의 문화가 만연하다. ‘20대에 꼭 해야 할 일’ ‘30대 성공법’ 등을 훈계하듯 강요하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기업 채용에는 보이지 않는 나이 제한이 있다. 한 번 궤도에서 이탈하거나 실패한 이들에게는 차가운 시선이 박힌다. 잘못을 저질렀거나 실수한 사람들의 재기에도 위로와 응원보다 조롱과 비난이 앞선다.
<싱어게인>의 무대에 선 이들은 실력이 없어서 무명인 것이 아니다. 단지 운이 닿지 않았고, 기회가 오지 않았을 뿐이다. <싱어게인>은 그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묻는다. 우리가 그동안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조용히 탈락시켜 왔는지를. 우리 사회는 그동안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운’과 ‘기회’가 닿지 않았던 수많은 이들을 너무 쉽게 외면해온 것은 아니었는지.
실패는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출발점이어야 한다. 실패해도 괜찮은 사회, 나이가 들어도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세상이어야 한다. ‘싱 어게인’은 노래를 다시 부르는 것을 넘어, 고난과 실패를 당당히 말할 수 있게 하는 무대다. 이제 우리는 TV 속 무대가 아닌 현실에서도 그들의 ‘이름’을 다시 불러주어야 한다. 누군가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사회가 건네는 가장 정중한 ‘두 번째 기회’다.
김봉석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