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80주년 경향신문

설명 뒤에 숨을 때



완독

경향신문

공유하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X

  • 이메일

보기 설정

글자 크기

  • 보통

  • 크게

  • 아주 크게

컬러 모드

  • 라이트

  • 다크

  • 베이지

  • 그린

컬러 모드

  • 라이트

  • 다크

  • 베이지

  • 그린

본문 요약

인공지능 기술로 자동 요약된 내용입니다. 전체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본문과 함께 읽는 것을 추천합니다.
(제공 = 경향신문&NAVER MEDIA API)

내 뉴스플리에 저장

설명 뒤에 숨을 때

입력 2026.01.20 20:02

수정 2026.01.20 20:03

펼치기/접기

우리는 설명의 시대에 살고 있다. 보고서는 두껍고, 진단은 정교하며, 문제의 원인은 빠짐없이 정리된다. 통계는 늘 최신이고, 그래프는 점점 세련된다. 무엇이 왜 잘못되었는지에 대해서만큼은 거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 그런데 그다음 장면이 좀처럼 오지 않는다. 결정이 없다. 책임도 없다.

책임을 물을 때마다 설명은 늘어난다. 그리고 그 설명은 거의 언제나 두 갈래로 갈라진다. 하나는 시스템 탓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의 선택 탓이다. 구조가 문제이거나, 개인의 판단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갈래 설명이 등장하는 순간, 결정의 순간은 마법처럼 사라진다. 누가 무엇을 선택했는지, 왜 그 선택이 가능했는지는 모호해진다.

설명은 본래 책임을 위해 존재했다.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그 결과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 말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설명은 책임을 밀어내는 기술이 되었다. 이 지점에서 설명은 이상한 균형을 이룬다. 사고가 나면 ‘시스템의 한계’가 원인이 되고, 성과가 나면 ‘개인의 탁월한 판단’이 공로가 된다. 실패는 구조에 흡수되고, 성공은 개인에게 귀속된다. 설명은 공정해 보이지만, 책임은 늘 비어 있다.

역설적으로, 많은 결정은 애초에 설명에 기반해 내려지지도 않는다. 중요한 결정들이 충분한 분석과 근거 위에서 내려진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설명은 출발점이 아니라, 사후에 덧붙여지는 정당화에 가깝다.

한때 ‘인플레이션 2%’라는 목표는 모든 중앙은행에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성배와 같았다. 고도의 과학적 합의가 뒷받침된 기준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출발은 믿기 어려울 만큼 우연이었다. 1990년대 초 뉴질랜드의 재무장관이 인터뷰에서 대략적인 기준으로 제시한 숫자가 중앙은행의 목표가 되었고, 이후 뉴질랜드의 ‘우연한 성과’ 덕분에 반복과 인용, 이론화를 거치며 세계적 기준으로 굳어졌다. 우연한 숫자가 필연이 되자, 이 목표로 인해 경제적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속출해도 책임질 사람은 없다. 목표를 법정에 고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책임은 없고 시스템만 남는 사례는 수 없이 많다. 최근 쿠팡의 국회 청문회가 대표적이다. 사고는 발생했지만, 누구도 “내가 결정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판단은 시스템이 했고, 절차는 규정에 따랐으며, 개인은 규정의 집행자였다는 설명이 반복됐다. 그 결과, 사고는 있었지만 결정자는 없었고, 결과는 있었지만 책임의 주어는 끝내 등장하지 않았다. 책임 없는 설명의 도돌이표 속에서, 애먼 소비자와 노동자의 ‘잘못된 선택’만 유죄다.

여기서 설명은 다시 두 갈래로 작동한다. 한편에서는 “시스템이 그렇게 작동했다”고, 다른 편에서는 “개인의 일탈은 없었다”고 말한다. 시스템과 개인 사이에 놓여 있어야 할 결정의 순간은 그 틈에서 사라진다. 설명은 완벽하지만, 책임은 발생하지 않는다.

이 패턴은 특정 기업이나 조직만의 문제가 아니다. 정부든 국제기구든, 대기업이든 대학이든 비슷하다. 어떤 선택은 제한된 정보와 시간 속에서 내려진다. 그러나 그 선택을 둘러싼 설명은 끝없이 확장된다. 보고서는 “추가 분석이 필요하다”는 문장으로 마무리되고, 그 분석은 다시 다음 선택을 정당화하는 재료가 된다. 설명은 순환하지만, 누가 선택했는지는 점점 보이지 않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설명을 좋아한다. 설명은 안전하기 때문이다. 노동과 복지, 청년과 기후, 불평등과 민주주의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시끌벅적하지만, 이 소란은 종종 저쪽 설명이 이쪽 설명에 시비를 거는 것일 뿐이다. 설명은 갈등을 중재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결정을 연기한다. 반면 결정은 언제나 불편하다. 누군가에게는 손해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불공정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우리는 설명을 더 쌓고, 결정을 더 멀리 밀어낸다.

그 결과 사회는 점점 더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동시에 더 무기력해진다. 모두가 문제를 아는 사회는 문제를 해결하는 사회가 아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또 다른 설명이 아니라, 설명의 방향을 바꾸는 일일 것이다. 시스템과 개인 사이에 묻혀 있던 결정의 순간을 다시 드러내는 일,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를 감당할 주체를 다시 호명하는 일이다. 그 작업 없이는 설명은 계속 늘어날 것이고, 책임은 계속 보이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렇게 긴 설명 끝에 남는 것이 있다면, 아마도 그 설명을 매일같이 써온 나 자신일 것이다.

이상헌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이상헌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 AD
  • AD
  • AD

연재 레터를 구독하시려면 뉴스레터 수신 동의가 필요합니다. 동의하시겠어요?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콘텐츠 서비스(연재, 이슈, 기자 신규 기사 알림 등)를 메일로 추천 및 안내 받을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레터 구독을 취소하시겠어요?

뉴스레터 수신 동의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서비스를 메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 동의를 거부하실 경우 경향신문의 뉴스레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지만 회원가입에는 지장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1이메일 인증
  • 2인증메일 발송

안녕하세요.

연재 레터 등록을 위해 회원님의 이메일 주소 인증이 필요합니다.

회원가입시 등록한 이메일 주소입니다. 이메일 주소 변경은 마이페이지에서 가능합니다.
이메일 주소는 회원님 본인의 이메일 주소를 입력합니다. 이메일 주소를 잘못 입력하신 경우, 인증번호가 포함된 메일이 발송되지 않습니다.
뉴스레터 수신 동의
닫기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서비스를 메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 동의를 거부하실 경우 경향신문의 뉴스레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지만 회원가입에는 지장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1이메일 인증
  • 2인증메일 발송

로 인증메일을 발송했습니다. 아래 확인 버튼을 누르면 연재 레터 구독이 완료됩니다.

연재 레터 구독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경향신문 홈으로 이동
뉴스레터 구독
닫기

전체 동의는 선택 항목에 대한 동의를 포함하고 있으며, 선택 항목에 대해 동의를 거부해도 서비스 이용이 가능합니다.

보기

개인정보 이용 목적- 뉴스레터 발송 및 CS처리, 공지 안내 등

개인정보 수집 항목- 이메일 주소, 닉네임

개인정보 보유 및 이용기간- 원칙적으로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목적이 달성된 후에 해당정보를 지체없이 파기합니다. 단, 관계법령의 규정에 의하여 보존할 필요가 있는 경우 일정기간 동안 개인정보를 보관할 수 있습니다.
그 밖의 사항은 경향신문 개인정보취급방침을 준수합니다.

보기

경향신문의 새 서비스 소개, 프로모션 이벤트 등을 놓치지 않으시려면 '광고 동의'를 눌러 주세요.

여러분의 관심으로 뉴스레터가 성장하면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 등의 매체처럼 좋은 광고가 삽입될 수 있는데요. 이를 위한 '사전 동의'를 받는 것입니다.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광고만 메일로 나가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뉴스레터 구독
닫기

닫기
닫기

뉴스레터 구독이 완료되었습니다.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
닫기

개인정보 이용 목적- 뉴스레터 발송 및 CS처리, 공지 안내 등

개인정보 수집 항목- 이메일 주소, 닉네임

개인정보 보유 및 이용기간- 원칙적으로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목적이 달성된 후에 해당정보를 지체없이 파기합니다. 단, 관계법령의 규정에 의하여 보존할 필요가 있는 경우 일정기간 동안 개인정보를 보관할 수 있습니다.
그 밖의 사항은 경향신문 개인정보취급방침을 준수합니다.

닫기
광고성 정보 수신 동의
닫기

경향신문의 새 서비스 소개, 프로모션 이벤트 등을 놓치지 않으시려면 '광고 동의'를 눌러 주세요.

여러분의 관심으로 뉴스레터가 성장하면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 등의 매체처럼 좋은 광고가 삽입될 수 있는데요. 이를 위한 '사전 동의'를 받는 것입니다.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광고만 메일로 나가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닫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