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송파구 쿠팡 본사 건물. 성동훈 기자
“쿠팡이 같은 컨셉의 PB(자체 상표) 상품을 내놓은 뒤 판매량이 월 3000건에 달하던 제품 판매량이 뚝 떨어졌고 얼마 안 가 단종 됐습니다. 문제제기 이후에도 약 10건의 상품이 같은 방식으로 피해를 봤습니다.”
쿠팡의 한 입점업체 대표 A씨는 20일 통화에서 “다른 분야도 보면 쿠팡은 판매량이 높은 상품을 위주로 PB상품을 출시했다”면서 “단순히 ‘컨셉을 베꼈다’는 게 아니라 입점업체의 판매데이터를 가지고 제품을 선별했다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말했다.
쿠팡이 PB제품을 출시하면서 입점업체 데이터를 부당하게 사용했다는 의혹에 대해 정부가 칼을 빼 들었다. PB제품 논란이 커지면서 플랫폼 업체가 입점업체의 판매 데이터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데이터 불균형’ 문제가 플랫폼-입점업체간 새로운 갑을관계 문제 유형으로 떠오를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플랫폼이 입점업체의 데이터 남용을 막기 위해 폭넓게 법을 적용하거나 새로운 규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공정위는 쿠팡이 과거 입점업체의 데이터를 활용해 PB상품을 만들었다는 의혹 등에 관해 이달 중순부터 현장 조사를 벌이고 있다. 쿠팡의 개인정보 유출 논란 이후 국회에서 여러 문제제기가 이어지자 사실관계 확인에 나선 것이다.
쿠팡이 입점업체 제품 데이터를 이용해 PB상품을 만들었다는 의혹은 2022년 참여연대의 문제제기에서 시작됐다. 당시 참여연대는 쿠팡의 알고리즘 및 리뷰 조작을 통해 입점업체 상품을 밀어내고 PB상품을 의도적으로 순위권으로 올렸다고 공정위에 신고했다. 또 쿠팡의 PB상품 담당 자회사인 씨피엘비(CPLB)가 판매 순위가 높은 입점업체 상품을 본떠 PB상품을 만든 뒤 가격은 최대 54% 싸게 판매했다는 내용도 함께 지적했다.
공정위는 2024년 상품 노출 알고리즘을 PB상품에 유리하게 설계하고, PB상품에 우호적인 리뷰를 대거 작성하는 등 혐의에 대해 쿠팡에 과징금 1628억원을 부과했다.
그러나 이는 입점업체 데이터 도용 혐의가 아니라 PB상품에 유리하게 온라인상에서 노출시켰다는 부분을 위반사항으로 본 것이다. 공정위는 입점업체 데이터 도용 의혹에 대해서는 “쿠팡이 입점업체 판매상품 중 판매량과 수익성이 좋은 상품 선별해 PB상품으로 생산했다”면서도 법 위반이라고 판단하지 않았다. 상당수 PB상품이 생수·물티슈 등 생산하기 쉬운 제품이라 도용으로 보기 어렵다는 점이 고려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정희 중앙대 경제학부 교수는 “아이디어 도용의 경우 기술탈취 분야에서도 흔히 일어나는 분쟁인데 도용의 증거를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면서 “특히 플랫폼이 판매 상품의 아이디어를 도용한 경우는 전례가 없어 입증이 더 어려울 수 있다”고 말했다.
이때문에 당장 문제 삼을 수 있는 부분은 쿠팡이 입점업체의 판매데이터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구조다. PB상품 출시로 입점업체 상품과 사실상 경쟁관계에 놓인 쿠팡이 입점업체 판매량 등을 자유롭게 수집해 경영전략을 짜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쿠팡내 PB상품 부서는 당시 입점업체의 상품의 판매 개수와 재고현황·매출원가 등 자료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황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판매데이터는 중소기업 입장에서 경영의 핵심 데이터라 플랫폼이 이를 일방적으로 이용할 경우 업체의 이익이 중대하게 침해될 수 있다”며 “과거 백화점도 입점업체에 판매 데이터를 요구했다가 ‘경영 간섭’으로 처벌된 바 있는데 이번 경우는 입점업체의 의사와 무관하게 정보가 쿠팡에 넘어가 있는 상태라는 점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주병기 공정위원장은 19일 유튜브채널 ‘최욱의 매불쇼’에 출연해 “납품업체가 어렵게 상품을 개발한 노력의 대가를 누릴 수 있게 해줘야 하는데 쿠팡이 PB상품으로 이를 약탈해갈 수 있는 게 문제”라며 “데이터를 만든 사업자들에게 데이터에 대한 권리를 부여하고, 플랫폼 업체가 독점하지 못하도록 하는 규제도 고려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유럽연합의 디지털시장법(DMA)에는 시장지배적플랫폼에 입점업체의 데이터를 오남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처벌 조항이 마련돼 있다. 실제로 유럽 경쟁당국은 2019년 아마존이 판매자 데이터를 사용하자 조사를 벌여 자진 시정을 끌어내기도 했다.
한국은 아직 공정거래법상 플랫폼의 데이터 남용을 콕 집어 제재할 수 있는 규정이 없다. 거래상 지위남용이나 시장지배적지위 남용 등으로 규율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사업을 부당하게 방해했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하는 등 절차가 다소 까다롭다.
공정위 관계자는 “비슷한 전례를 보면 현행법으로 규율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거래상 지위 남용’ 등은 폭넓게 해석되는 조항이라 ‘데이터 남용’만 콕 짚어서 입증하려면 부담이 느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황 교수는 “데이터 남용을 하나의 독립적인 규제 유형으로 온라인 플랫폼 법에 포함하는 것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