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쾨슬러의 <한낮의 어둠>은 당과 개인의 관계를 집요하게 파고든 정치 소설이다. 주인공 루바쇼프는 김병기처럼 정보기관 출신이다. 권력서열 2위까지 올라간 그가 어느 날 반역 혐의로 심문을 받는다.
심문의 목적은 진실을 밝히는 데 있지 않다. 잘못을 인정하고 처벌을 받아들여 당과 혁명의 대의를 지키라는 것, 심문관은 일관되게 그것을 요구한다. 더불어민주당의 박지원도 김병기에게 같은 것을 말했다. “선당후사의 살신성인의 길”을 택하라. 안 그러면 “당이 힘들어진다”.
루바쇼프의 심문관은 말한다. 당 앞에 개인은 없다. 개인은 ‘허영’이고 ‘제로’일 뿐, 실존하는 것은 전체로서의 당이다. 당은 개인의 희생 위에서만 전진할 수 있다. 한결같이 옳은 것은 당이지 개인이 아니다. 개인은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종속된 존재, “경제적 숙명성이라는 계시 아래 서 있(는)” 가여운 존재다. 경제법칙에 따를 수밖에 없는 개인은 무기력하다.
당만이 역사법칙의 수레바퀴를 바꿀 수 있다. 그 일을 위해 당은 대중을 필요로 한다. 대중은 의식과 감정을 가진 집단적 덩어리다. 100만명의 개인이 합쳐서 100만명의 당원이 되는 게 아니다. 개인이 앞서면 당의 정신은 분열로 고통받는다. 각자는 소금 알갱이처럼 당이라는 바다에 녹아들어 대양(大洋)을 이루어야 한다.
심문관은 그런 대중을 ‘x’라고 정의한다. 혁명가에게 정치란 “x의 실제적 본질을 생각하지 않은 채 x로 작업하는 걸 의미”한다고도 말한다. 대중이 1인 1표, 숫자, 통계로 자신의 존재를 표현해줄 때 비로소 당은 통일된 의지로 일할 수 있다. 이 방정식을 방해하는 개인은 제거되어야 한다.
당 앞에 ‘개인은 제로’·‘대중은 X’
먼 훗날 “인민 대중 스스로 민주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때”가 올 것이다. 그때까지 지켜야 할 것은 개인이 아니라 당이다. 혁명가라면 “스스로 쓰레기가 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더라도” 당을 옹호할 줄 알아야 한다. 긴 심문 끝에 루바쇼프는 잘못을 인정한다. 당에 헌신하는 마지막 기회로 삼으라는 심문관의 요구를 받아들인다. 그게 끝이다.
어차피 루바쇼프에게 처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선택은 당을 거역해 용서받을 수 없는 개인으로 사라질지, 아니면 끝까지 당을 위해 살았다고 자신을 위로하며 소멸할지에 있다. 결과를 지배한 것은 얼음같이 차가운 “당적 사고”의 합리성이다.
당적 사고의 합리성은 당이 절대적이라는 전제 위에서만 성립한다.
당 밖의 관찰자가 볼 때 그것은 한 개인이 경력의 정점에서 자신이 충성했던 당에 의해 희생되는 과정일 뿐이다. 이 모든 것이 과거의 혁명 정당에서만 볼 수 있던 일일까. 그렇지 않다.
김병기의 관점에서는 자신에게 닥친 비극이 갑작스러웠을 것이다. 한때 그는 당을 분열로 이끈 ‘친문 수박’을 제거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그 덕분에 안기부 출신으로 원내대표가 되었다. 검찰개혁과 내란척결을 위해 헌신했다는 그의 주장이 허위도 아닐 것이다. 당이 탈당을 요구했을 때 “나에게 당을 떠난 정치는 의미가 없다”고 답한 것 또한 진심이었을 것이다.
당 대변인 박수현은 요즘 ‘애당’과 ‘해당’이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김병기에게 탈당을 요구할 때는 “그토록 소중하게 여겨왔던 애당의 길”을 고민하라고 압박했다. 최고위원회 밖에서 이견을 표출한 의원에 대해서는 “더 가면 해당 행위”라고 경고했다. 강선우, 최민희, 장경태로 이어진 여러 악재에도 불구하고 당 시스템에 오류는 없다는 게 그의 입장이다. 어느덧 박수현은 ‘당적 사고’에 충실한 인물이 되었다.
정청래는 민주당에 있는 것은 “시스템 에러가 아닌 휴먼 에러”라고 말한다. 휴먼 에러를 제거하면 당은 다시 순수해질 것이다. 박지원은 인간적인 듯하면서도 잔인하게 당적 사고를 구현하는 일에 능숙하다. 김병기와 자신의 관계를 박지원은 “큰형님”과 “동생” 사이라고 말한다. 그의 결백을 “확실하게 믿는다”고도 한다. 그런데도 당을 위해 탈당하라고 ‘동생’ 김병기에게 눈물로 권했다고 한다. 그러고 돌아서서는 김병기의 제명을 태연하게 당에 요구했다. “잔인한 리더십”으로 당을 살려야 할 때라는 것이다.
구조보다 개인의 문제로 돌려
이들이 말하는 당은 오묘하다. 한편으로는 과거의 형제애를 부정하게 하는 알리바이이고, 그러면서도 지키고 헌신해야 하는 신비한 존재다. 당이 나가라고 하면 나가야 한다. 그럴 만한 혁명적 대의가 있는 것도 아닌 사람들이 모두 당을 절대시한다.
전두환의 내란 행위를 “영웅적 결단”으로 평가했던 이, 한때 “막말과 당 이미지 훼손”으로 공천에서 배제되었던 이, 민자당·자민련·국민신당을 거쳐 민주당으로 온 이, 5공화국의 안기부에서 경력을 시작한 이들이 서로에게 당을 힘들게 하지 말라고 하고, 당은 내가 지킨다고 한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현실이다.
박상훈 정치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