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사실들) : 78년 만에 확인된 이름
선(맥락들) : 제주에서 대구형무소까지 간 이유
면(관점들) : 국가가 멈춰도, 작별하지 않는다
제주 모슬포 섯알오름 학살터 전경. 미군의 폭격으로 오름이 함몰되면서 만들어진 구덩이에서 1950년 7월16일과 8월20일 2차례에 걸쳐 집단학살이 발생했다. 정지윤 기자
“‘장작 마련’ 운운한 것은 함정이었다. 다짜고짜 ‘너 도로 차단했지!’ ‘전봇대 끊었지!’ 하며 구타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청년들을 골라내 차에 태웠다. 이때 많은 청년이 차에 태워졌고, 이들은 영원히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다. 형무소 수감자들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인민군에 밀리던 국군에 의해 집단 총살됐다. 유족들은 희생 날짜도 몰라 주로 생일에 맞춰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제주 4·3 진상조사보고서, ‘애월면 사례’ 중에서)
지난 23일 경북 경산시 코발트광산에서 발견된 유해의 신원이 제주 4·3 희생자로 확인됐습니다. 그중에는 제주시 애월면(현 애월읍) 소길리 출신으로, 제주 4·3 사건 당시 행방불명된 임태훈씨(당시 20세)도 있었는데요. 어째서 78년 전 제주에서 사라진 임씨의 유해가 경산 코발트광산에서 발견된 걸까요? 오늘 점선면이 그 시간을 따라가보겠습니다.
점(사실들): 78년 만에 확인된 이름
임태훈씨의 신원이 78년 만에 확인된 건 제주도와 제주4・3평화재단이 실시하는 ‘4・3 희생자 유해 발굴 및 유전자감식 사업’ 덕분입니다. 제주 4·3 사건 희생자들은 불법적인 군법회의 결과, 전국 각지 형무소로 끌려가 처형·학살당했는데요. 2023년부터 제주도 밖 유해의 유전자를 감식한 결과 암매장된 희생자들의 신원이 확인되기 시작했습니다.
2008년 경북 경산시 코발트 광산에서 진행된 유해 발굴 작업 모습. 제주도 제공
선(맥락들): 제주에서 대구형무소까지 간 이유
제주 4·3 사건 희생자가 전국 각지 형무소로 이감돼 학살당하는 과정은 당시 시대 상황 속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선 제주 4·3 사건이란 1947년 경찰의 발포 사건을 계기로 1948년부터 1954년 9월까지 제주도에서 벌어진 무력 충돌과, 국가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말합니다.
임태훈씨의 고향, 소길리 같은 제주 중산간 마을들은 군·경의 무차별 진압 피해가 컸습니다. 무장대가 주로 활동하는 곳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는데요. 1948년 11월 소길리 원동마을엔 무장대가 없었는데도 주민들이 총살됐습니다. 군인들은 어린 학생들, 4살 아이까지 무자비하게 목숨을 앗았습니다.
청년들은 무장대 활동과 무관하게 끌려가는 경우도 많았는데요. 동원령에 불려 나왔다가 무장대로 몰려 수감되는 식이었습니다. 당시 스무살이던 임태훈씨도 1948년 12월 경찰에 끌려갔습니다. 임씨는 제주에서 목포형무소로 옮겨졌다가 대구형무소에 이감됐습니다.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섯알오름 학살터에 놓인 고무신. 군경에게 끌려가며 죽음을 직감한 사람들은 가족들에게 흔적을 남기기 위해 가는 길에 드문드문 검정 고무신을 벗어 행선지를 알렸다고 한다. 제주|이준헌 기자
6·25 전쟁 발발 당시 전국 형무소에는 제주 4·3사건 관련 재소자가 분산 수감돼 있었는데요. 이 가운데 대구형무소에 있던 142명은 1950년 7월 형무소로부터 군에 인계됐고, 예비검속(잠재적 적으로 간주해 구금) 후 산골짜기, 폐광 등 인적이 드문 곳에서 즉결처분·처형됐습니다. 학살은 대구뿐 아니라 서울 서대문·마포·광주·대전·전주형무소 등에서 전국적으로 이뤄져 실종된 희생자만 2500여명에 이릅니다.
이승만 정부는 진상을 은폐했는데요. 1960년 4·19 혁명으로 정권이 무너지면서 국회 차원의 제주 4·3사건 진상 조사 및 증언 청취가 실시됐습니다. 이때 현장조사에 참여해 대구 가창골·경산 등을 찾았던 이복녕씨는 “버려진 유골들로 가득 찼고, 무수히 많은 탄피가 흩어져 있었으며, 땅속에는 수천구의 유골이 묻혀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임태훈씨는 이렇게 묻혔습니다.
면(관점들): 국가가 멈춰도, 작별하지 않는다
임태훈씨의 유해가 발굴되기까지는 다시 50년이 필요했습니다. 4·19 혁명 이듬해 5·16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4·3 논의가 중단되고 말았거든요. 국가 차원의 4·3 진상규명은 1999년 4·3 특별법이 제정된 후에야 가능했습니다. 유전자 감식은 더 더뎌 제주도 내 희생자는 2010년, 제주도 밖 희생자는 2023년부터 신원이 확인되기 시작했고요.
예산 문제는 사업의 지속성에 영향을 미쳤는데요. 2011년 이후 유해 발굴이 잠시 중단됐던 건 2010년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이 예산안을 ‘날치기’ 통과시키는 과정에서 예산이 전액 삭감된 영향이었습니다. 이후 2017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며 ‘과거사 문제 해결’을 국정과제로 내걸면서 예산이 다시 복원됐습니다.
‘육지’ 지방자치단체(지자체)들의 무관심과 외면도 숙제입니다. 대전 골령골은 제주 4·3 희생자 300여명이 집단학살된 뒤 암매장된 곳인데요. 2001년 대전 동구청이 이곳에 건축 허가를 내주는 바람에 현장과 유골 일부가 훼손됐습니다. 2004년 추진된 원형 보존사업은 대전 동구청의 소극적인 태도로 무산되고, 행정안전부가 2016년부터 추진 중인 위령시설 건립은 10년째 첫 삽도 뜨지 못했습니다.
대전 산내평화역사공원 조감도. 대전 동구 제공
이에 사업의 지속성 담보, 다른 지자체와의 조율 등을 위해 제3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가 조속히 출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옵니다. 진화위는 근현대사 사건 조사 및 진상규명을 담당하는 독립기구인데요. 제2기 진화위는 제주도와 대전 골령골, 광주형무소 옛터 유해 분석 작업 등을 협업하다가 지난해 11월 활동을 종료했습니다. 제3기 진화위 출범을 위한 법 개정안은 여야 갈등으로 본회의에 계류 중입니다.
국가가 멈춘 동안에도 “잊지 않겠다”는 마음들은 쌓여 제주 4·3을 다시 불러내는 힘이 되고 있습니다. 4·3으로 집안 식구들을 잃은 김옥자 할머니(84)는 2021년 “차라리 그때 같이 죽어져시믄(죽었다면) 하고 생각하면서도 억울한 마음으로 긴 세월을 버텼다”고 말했습니다. 한강 작가 역시 제주 4·3을 다룬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쓰며 “작별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생각했다고 밝힌 바 있고요.
그 시간들 끝에 임태훈씨는 78년 만에 제주로 돌아왔습니다. 그의 귀향은 과거를 떠나보내는 일이 아닙니다. 아직 육지에 남은 수많은 희생자의 귀환이 마무리될 때까지, 4·3과는 작별할 수 없습니다.
2020년 1월22일 오전 제주4·3평화교육센터 강당에서 열린 제주4·3희생자 신원 확인 보고회에서 신원 확인된 희생자의 유족들이 오열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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