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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사의 ‘월권’ 더 방치할 수 없다

입력 2026.01.27 20:00

2018년 12월21일 한·미 양국은 워킹그룹 회의를 열어 독감 치료제 타미플루의 대북 지원 등에 합의했다. 타미플루 20만명 분과 신속진단키트 5만명 분으로, 이명박 정부 때의 절반 규모였다. 이듬해인 2019년 1월11일 경의선 육로를 통해 타미플루를 북한에 전달하려던 이 계획은 유엔군사령부의 제지로 무산됐다. 타미플루는 인도적 지원 품목이라 문제없지만, 의약품을 실은 트럭은 대북 제재 대상이어서 군사분계선을 통과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약품을 내려놓고 트럭은 귀환할 것이라는 설명에도 유엔사는 요지부동이었다. 북측 관계자들은 타미플루를 받기 위해 사흘간 개성에서 대기하다 허탕을 치고 돌아갔다고 한다. 세 차례 남북정상회담으로 탄력이 붙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 찬물을 끼얹은 사건이었다. 당시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이던 윤건영 민주당 의원은 “트럭이 문제라면 봇짐을 지거나, 수레를 끌고서라도 전달했어야 했다”고 아쉬워했다.(윤건영 지음, <판문점 프로젝트>)

유엔사는 한국전쟁 당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로 창설됐으나, 현재 실상은 ‘다국적군의 외관을 띤 미군 조직’이다. 정무적 판단은 미국 정부가, 운용은 유엔사령관을 겸직하는 주한미군사령관이 맡고 있어 유엔과는 무관하다. 미 국무부가 워킹그룹에서 타미플루의 대북 지원에 동의해놓고, 미 국방부의 지휘를 받는 유엔사가 반출을 불허했으니 전형적인 ‘이중 플레이’였다. 2005년 6자회담에서 북핵 동결과 북·미관계 개선을 담은 ‘9·19 합의’가 도출된 직후 미국 재무부가 방코델타아시아은행의 북한 계좌를 동결해 합의를 파탄시킨 것과 다르지 않다.

정전협정에 따르면 군사분계선 통과 허가권은 군사정전위원회에 있고, 유엔사는 비무장지대(DMZ) 남측 지역의 출입통제와 ‘민사행정 및 구제 사업’을 책임지도록 돼 있다. 군사정전위가 1994년 사실상 해체됨에 따라 유엔사가 군사분계선을 통제하고 있으나 이것이 타당한지는 의문이다. 협정에 따르면 군사분계선 통과 허가는 오직 군사정전위의 권한이기 때문에 유엔사는 존재하지도 않는 권한을 자의적으로 행사하고 있는 셈이다. 정전협정이 ‘순전히 군사적 성질’에 속한다는 취지에 따르면 유엔사의 DMZ 통제권 행사도 ‘군사적 사안’에 한정돼야 한다.

그러나 유엔사는 남북의 평화를 증진하기 위한 목적의 군사분계선 통과와 DMZ 출입에 번번이 제동을 걸었다. 타미플루 대북 지원 건 외에도 2018년 8월 남북철도 경의선 북측 구간 현지조사, 2019년 2월 새해맞이 금강산 남북 민간 행사 취재 장비 반출, 2019년 6월 태봉국 철원성터 남측 지역 현지조사, 2019년 6월 한·독 통일자문위원회 고성 감시초소 방문, 2019년 8월 통일부 장관 대성동 마을 방문 기자단 출입, 2019년 10월 전국체전 100회 기념 공동경비구역 성화 봉송 등이 줄줄이 불허됐다. 지난해 7월엔 교황청 장관인 유흥식 추기경의 DMZ 방문을 불허했고, 12월엔 김현종 국가안보실 1차장의 현장 방문을 한때 막았다가 비판이 일자 허가했다.

반면, 유엔사가 윤석열 정부의 대북 무인기 침투 공작을 통제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2024년 10월 ‘평양 무인기’ 사건에 북한이 공개 반발하자 진상조사에 착수하겠다고 밝힌 것이 고작이다. 유엔사는 DMZ 일대 공역(空域) 통제권을 갖고 있으므로 무인기가 군사분계선을 넘었다면 유엔사가 책임져야 한다. 윤석열 정부의 군이 대북전단을 23차례나 날리는 동안 유엔사가 뭘 했는지도 의문이다. 유엔사가 윤석열 정부의 대북 적대행위에는 소극적으로 대응하면서 평화 증진을 위한 군사분계선·비무장지대 출입을 이토록 엄격히 막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지난 23일(현지시간) 공개한 미 국방전략에서 한국이 “더 제한적인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대북 억지에서 주된 책임을 질 능력이 있다”고 했다. 사실상 대북 억지의 책임을 한국에 일임하겠다는 것이다. 동맹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전략이 탐탁지 않지만, 이것이 불가피하다면 미국은 그 대가로 “위기 관리와 평화 설계에서 한국의 재량과 전략적 자율성의 공간을 인정”(김동엽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해야 한다. 대북 억지는 평화 증진을 통해서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남북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로 간주하고 있어 ‘바늘구멍’조차 뚫기 어려운 현실이지만, 그것이 유엔사의 주권 침해를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한·미 양국이 건설적인 논의를 통해 유엔사의 월권을 제어하길 바란다.

서의동 논설실장

서의동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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