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을 금융상품으로 만들어 증권화하는 시대다. 미국은 1970년대 중반부터 한 번도 무역흑자를 기록하지 못했다. 2000년대부터 무역적자 규모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왔고, 재정적자도 이제 감당하지 못할 수준까지 늘어났다. 다른 국가였다면 이미 망했어야 하지만 미국은 여전히 건재하다. 금융이 실물을 압도하는 금융자본주의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미국의 힘은 주주자본주의에 있다. 1987년 영화 <월스트리트>의 주인공 대사를 상기하자. “탐욕은 선이다”라고 주주총회에서 외치는 주주 우선의 시대가 장기 강세장을 이끌어왔다.
일본도 다르지 않다. 2012년 12월16일 야당인 자민당이 294석을 차지하며 아베 내각이 출범한다. 아베는 미국을 보고 배웠다. 자기자본이익률(ROE)을 높이고, 기업이 주주환원을 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경제성장을 이끌어낼 것으로 판단했다. 2014년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하고 2015년에는 일본 기업 지배구조 코드를 시행한다. 거버넌스(지배구조) 개혁을 본격화하면서 동시에 2015년 일본 중앙은행(BOJ)은 주식 상장지수펀드(ETF)를 매입한다. 글로벌 투자자들은 변화하는 일본 증시를 주목했고, 월가의 대표적인 투자가 워런 버핏도 일본의 주요 상사 지분을 10% 이상 매입했다.
마지막 한 발은 2023년에 단행됐다. 도쿄증권거래소는 상장기업에 주가순자산비율(PBR) 1배 미만이면 사업전략과 자본정책을 개선할 것을 요구했다. 일본 증시는 장부가를 벗어나, 버핏지수(주식시장 시가총액을 국내총생산으로 나눠 주식시장의 과열을 판단하는 지표)가 급등하며 미국이 앞서간 길을 뒤따라갔다. 닛케이225지수는 30년 만에 최고점을 돌파했고, 주식시장 호황의 힘으로 디플레이션 탈출에 성공했다.
한국 증시는 아주 오랫동안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당연시해왔다. 분단국가의 위험이 반영됐다는 견해가 있지만 동의하기 힘들다. 중국의 대만 침공 이야기가 공공연히 미디어를 장식하지만 대만 증시의 PBR은 한국 증시에 비해 월등히 높다. 배당수익률이 높아 기업이 번 돈이 온전히 주주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한국 증시가 오랫동안 글로벌 투자자로부터 외면당한 이유는 주주를 경시하는 기업의 의사결정 구조에 있었다. 하지만 이제 한국도 미국과 일본에 이어 그 길을 가고 있다.
지난해 7월 이사의 충실의무 조항에 ‘주주’라는 단어가 들어갔고, 한국도 주주자본주의 시대의 거대한 첫발을 내디뎠다. 오너가치가 주주가치를 압도하는 거버넌스에 균열이 시작된다.
물론 여전히 중복상장 이슈는 존재하고, 이사회는 오너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도 현실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굳어 있던 관성이 서서히 깨지고 있고 주주를 바라보는 기업의 시선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생각하지 않던 기업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제 어떤 기업이든 ‘주주를 경시해서는 안 된다’ 정도는 공감한다. 단지 행동한 기업과 아직 행동하지 않은 기업이 있을 뿐이다.
3차 상법 개정은 이러한 기업들의 변화를 가속화할 것이다. 지난해 9월 여당의 국회의원 워크숍에서 이후 처리해야 할 중점 법안 중 ‘자사주 소각’ 내용이 빠진 뒤, 거버넌스 개혁 관련주들의 주가 흐름은 주춤했다. 자기 주식 의무 소각 법안이 7월 발의된 뒤 재계의 격렬한 저항이 있어 여당도 밀어붙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미 보유하고 있는 자사주를 의무 소각해야 하면 대기업집단 총수들의 지배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앞으로도 난항이 예상된다. 일각에서는 자사주 의무 소각으로 진행될 수 있을지 여전히 의구심을 표명하기도 한다.
지난 23일 더불어민주당 코스피 5000 특별위원회 오찬에서 당정은 자사주 의무 소각을 핵심으로 한 3차 상법 개정을 신속히 처리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법안이 통과하면 자사주를 취득하는 경우 1년 이내, 이미 보유 중인 자사주는 1년6개월 이내(유예기간 6개월 포함) 각각 소각해야 한다. 이제 기업은 영업활동으로 만든 현금 중 투자하고 남은 돈을 주주환원에 써야 한다. 배당으로 주주에게 주거나, 자사주 매입 후 소각으로 주식 수를 줄여 기업가치를 높일 수밖에 없다.
한국 증시는 이제 코리아 디스카운트에서 벗어나 정상화되고 있다. 총수에 의한 일사불란한 명령체계가 신흥(EM) 증시에는 무기가 되었지만 한국 경제가 이미 선진국 규모가 된 만큼 기업의 의사결정 구조도 바뀌어야 한다. 이제 기업 실적이 좋아지면 주주도 보상을 받는 시대로 나아간다. 늘어나는 현금 흐름 중 일부는 보상받고 성장하면 그만큼 자신의 몫도 불어난다. 바로 미국과 일본이 앞서간 길이 그러했다.
윤지호 경제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