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는 원래 권위를 해체하는 장치이자 수단이었다.
옛날 야구에서는 무사 1루에서 거의 무조건 번트를 댔다. 득점 확률을 높이기 위해 다음 타자를 ‘희생’시키는 감독의 결정이었다. 1번 타자는 출루율이 높은 선수를 썼고, 2번 타자는 ‘작전 수행 능력’이 좋은 선수를 주로 배치했다. 말이 좋아 작전 수행 능력이지, 감독의 말을 잘 듣는다는 얘기에 가깝다. 감독들은 자신의 경험과 감에 기반한 작전을 통해 권위를 만들고 유지했다.
야구에 대한 데이터가 쌓였다. 주자와 아웃카운트 상황에 따른 기대 득점과 기대 확률을 계산해 무사 1루와 (희생번트를 통해 만든) 1사 2루의 기대 득점, 득점 확률을 비교했더니 오히려 무사 1루에서 점수를 낼 가능성이 컸다. 번트는 비효율적 작전이었다.
측정 기술이 발달했고, 레이더와 초고속 카메라를 들이대자 더 많은 데이터가 쏟아졌다. 한때 진리라 믿었던 많은 ‘야구 교리’가 무너졌다. 그 교리에 기반했던 권위도 함께 무너졌다. 감독의 역할은 지휘에서 지지로 바뀌고 있다. 야구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많은 ‘교리’와 ‘권위’는 데이터가 공개되고 여럿이 이를 분석하자 평평해지기 시작했다. ‘데이터 민주주의’는 실생활의 민주주의를 다시 일으켜줄 희망처럼 보였다.
‘권위 해체’ 도구였던 데이터
빅테크·감시 자본주의 거치며
‘권위·도구주의’ 권력으로 변질
‘합리적 감정’도 지배될 것인가
그런데, 이후 묘한 일이 벌어졌다. 엄청난 데이터가 채집됐다. 구글로 대표되는 거대 기술기업은 ‘데이터 부스러기’라는 명목으로 사람들의 행동 패턴을 끌어모았다.
쇼샤나 주보프는 책 <감시 자본주의 시대>에서 ‘데이터 부스러기’라는 용어가 진실을 가린다고 폭로한다. 동화 ‘헨젤과 그레텔’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 빵 부스러기를 일부러 흘렸고 기술기업들은 그렇게 흘린 부스러기를 모아서 합리적 결정을 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원치 않는, 혹은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미시적으로 분절된 각종 데이터가 수집된 뒤 “사실은 너 이걸 좋아하지”라는 강요로 이어진다(쇼츠를 한 번 보기 시작하면 끊지 못하는 이유다).
넘치도록 긁어 모인 데이터와 거대 규모의 분석은 ‘합리성의 강요’로 이어진다.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A가 가장 성공 확률이 높으니 A가 정답이라는 강요다. A를 택하지 않으면 ‘나락 갈 수 있다’는 공포가 덧붙여진다. 심지어 많은 경우 데이터 분석 과정의 알고리즘은 공개되지 않는다.
주보프는 ‘도구주의 권력 체제’라고 부른다. 인간을 기계나 알고리즘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권력 체제다. 그 권력은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빅데이터 기업이 쥐고 있다.
정치도 이에 쉽게 끌려간다. 주보프는 “힘들고 어려운 정치적 선택을 피할 수 있게 하는 수단이자 무질서가 우려되는 곳에 새로운 종류의 질서를 부과해주리라는 약속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데이터 분석에 따른 ‘성공 확률’은 불편하고 힘든 민주적 논쟁과 숙의를 쉽게 대체한다.
데이터 민주주의는 데이터 권위주의로 빠르게 이동 중이다. 생성형 인공지능(AI)의 발전은 이를 가속화한다. 지금은 거대언어모델(LLM) 형태로 ‘말’과 ‘글’을 수집하지만 현대차의 ‘아틀라스’가 보여준 것처럼 AI는 이제 직접 행동 모형을 학습한다. ‘부스러기’가 아니라 ‘전체’가 데이터로 채집된다. 생각과 논리뿐만 아니라 ‘합리적 감정’도 강요될 차례다.
최근 화제의 시리즈 <이 사랑 통역 되나요?>에서 주인공 차무희는 이렇게 말한다.
“나도 파파고로 해결해보려 했는데, 내 마음을 좀 더 진정성 있게 전달하려면 AI보다 인간의 목소리가 통할 거 같아서요.”
하지만 머지않아 사랑도 확률이 될지 모른다. 진짜 이 사랑 확률이 될까? 사랑도 야구도 합리적이기만 하면 될까. 강요된 합리에 지배되지 않는 야구가 더 멋지지 않을까 하는 상상.
지난해 한국시리즈 4차전, 한화는 1승2패로 지고 있었다. 한화 선발 와이스는 3-0으로 앞선 8회에도 등판했다. 2사 2루에 교체됐다. 투구 수 117개는 분명히 많았고, 교체는 합리적 판단에 가까웠지만 결과는 충격의 역전패였다. 기세와 낭만으로 끝까지 던지게 했다면 그 야구는 어떻게 됐을까. ‘강요된 합리’라는 중력을 탈출하는 초속 11.2㎞의 힘이 되지는 않았을까.
이용균 콘텐츠랩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