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세상을 떠난 안성기 배우가 1993년 12월 당시 다섯 살 아들에게 남겼다는 편지에 눈물을 찔끔했다. “항상 겸손하고 정직하며 남을 사랑할 줄 아는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 실패나 슬픔을 마음의 평화로 다스릴 줄 아는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 이 세상에서 참으로 바꿀 수 없이 필요한 것이라면 바로 착한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평생 사생활 논란 한 번 없었던, 늘 한결같았던 그 다운 말이라고 심상하게 넘길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착한 사람’이란 말은 마음에 꽂혔다.
착한 사람이라는 말이 칭찬으로 들리지 않는 세상이다. 착한 사람 하면 무능하고, 무력하고, 심심한 사람을 떠올리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많은 어른은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덕담을 건넨다. 좀 더 현실적인 사람이라면 ‘부자가 되라’거나 ‘공부 잘해라’를 말할지 모른다. 그런데 착한 사람이라니…
<기쁜 우리 젊은 날>(1987) 속 주인공 영민은 안성기가 말하는 착한 사람과 딱 들어맞는 캐릭터일 것이다. 영화의 첫 장면은 이렇게 시작한다. 연극 무대에서 첫사랑의 기억을 이야기하는 혜린(황신혜), 꽃다발을 품에 앉은 채 객석에서 멍한 표정으로 혜린을 바라보는 영민(안성기). 순수하고 풋풋하고 무해한 영화 속 영민을 보며 실제 배우와 닮았을 거라고 오래전부터 생각했다. 한 남자의 순애보로 요약할 수 있지만, 감정은 과잉으로 치닫지 않으며 화면 연출 등은 요즘 영화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부인 오소영씨는 이 영화 포스터를 위해 찍었다는 그의 사진을 영정으로 쓰면서 고인의 성격과 마음이 잘 드러난 사진이라고 했는데, 기자의 오랜 짐작은 틀리지 않았던 것 같다.
기자가 좋아하는 그의 또 다른 영화는 <이방인>(1998)이다. 흥행에 실패한 탓에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재조명돼야 할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안성기가 맡은 김은 10년 전 아내와 딸의 곁을 떠나 폴란드에서 태권도장을 운영한다. 그의 일상은 도장에서 태권도를 가르치고, 늘 들르는 바에서 보드카를 마시는 게 고작이며, 좀처럼 희로애락을 드러내지 않는다. 딸에게 부치지 못하는 편지를 쓸 때 얼굴에 스치는 감정의 동요를 보고 쓸쓸함을 짐작할 뿐이다. 외롭다고 질질 짜는 것보다 지긋한 표정 속에 비치는 공허한 웃음이 더 가슴을 후벼 파는 법이다. 안성기의 내면 연기는 쓸쓸하고 외로운 영화의 정서와 썩 잘 어울린다.
다만 그는 그렇게 카리스마를 뿜는 배우는 아니었던 것 같다. <깊고 푸른 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등에서 악역을 했지만, 대부분 영화에서 그는 착했다. 감정을 꾹꾹 눌러담는 듯한 정제된 스타일의 연기를 했다. 존재만으로도 ‘나 배우야’라고 외치는 듯한 최민식이나 송강호 등 다음 세대 배우들과는 달랐다고나 할까. 그의 별세 이후 후배와 이야기를 나누다 이 지점에서 공감했다. ‘평생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던 자기 절제와 강박이 연기에도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닐까.’
아쉬운 건 짧게나마 영화 담당 기자를 했음에도 그를 만날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다. 논설위원 시절인 2021년 5월 영화 <아들의 이름으로> 홍보를 위해 각종 방송, 관객과의 만남 등에 모습을 비쳤던 그와 와이드인터뷰를 시도했었다. 당시 그는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는데, 많이 수척했고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당시 그가 혈액암을 앓는다는 말을 들었지만 기사화하지는 않았다. 그에게 e메일을 보내, 오랜 팬임을 밝히며 인터뷰를 요청했다. 답신은 이랬다. “그동안 많은 인터뷰, 무대인사, GV 등으로 좀 지쳤습니다. XX일보에서 주말 와이드인터뷰 요청을 받았는데 아무래도 다 못할 것 같습니다. 우리 영화, 저에 대해서도 좋게 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호의를 저버리는 것 같아 미안합니다.” 정중한 거절에 고개가 숙여졌다.
다시 착한 사람 이야기다. 영화 <증인>(2019)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자폐아 소녀 지우(김향기)는 자신을 살인사건 증인으로 세우려는 변호사 순호(정우성)에게 묻는다.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 민변에서 공익소송 등을 하다 돈을 좇아 대형 로펌에 들어간 순호는 변절한 자신을 좋은 사람이라 말할 수 없어 머뭇거린다. 이 영화를 보고난 뒤 좋은 사람은 어렵겠지만, 나쁜 사람은 되지 말자고 생각했었다. “세상에서 참으로 바꿀 수 없이 필요한 것이라면 바로 착한 사람”이라는 고인의 말을 되새기며 그때의 다짐을 떠올려 본다.
이용욱 문화에디터 겸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