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물감 대신 파마지를 씁니다. 미용실을 운영하던 어머니 곁에서 자라며 매일 만지던 그 얇고 투명한 종이입니다. 오랫동안 패션계에 몸담았던 친구가 그 질감에 매료된 듯 이렇게 말하더군요. “세상에, 파마지가 이렇게 우아할 수 있다고? 넌 그 깁스 풀면 여기부터 와야 해.”
언제나 타이틀은 그럴듯했지요. 패션지 에디터에서 로컬 크리에이터 겸 아트스테이 대표라고 명함의 타이틀이 바뀌었지만 사실상 나는 ‘나 스스로를 갈아 넣어 하루를 짓는 노동자’에 가깝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안 갈 수가 없지요. 미용실 노동자들이 매일 쓰고 버리는 그 ‘노동의 흔적(파마지)’을 주워 모아,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추상화를 만들었다는데.
그래서 기차를 타고 가서 봤습니다. 가서 보니, ‘보잘것없는 것들이 만드는 장엄함’에 먼저 가슴이 벅차더군요. 이제 막 깁스를 푼 다리로 내 발밑에 깔린 마크 브레드퍼드의 초대형 설치 작품 ‘떠오르다’ 위를 조심스럽게 걷는 기분이라니. 걸으면서 짐작해 보았습니다. LA 거리의 전단이나 광고 포스터 같은 가난한 동네의 수집품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야 이런 온갖 층위의 색과 의미가 뒤섞인 다채롭게 아름다운 바닥이 되는지.
거리에서 온 그 싸구려 재료에는 겨우 하루를 살아내는 어느 노동자에게 보내진 빚 독촉 안내문 같은 게 뒤섞여 있었을 겁니다. 흑인 빈민가의 노동자 계층답게 작가는 ‘사포질(Sanding)’로 붓질을 대신합니다. 캔버스에 물감을 칠하는 게 아니라, 종이(포스터, 전단)를 수십 겹 바른 뒤 전동 샌더로 갈아내고 찢어내는 거죠. 전시장에서 관객이 직접 작품 위를 걸으며 그 질감을 체험하게 합니다. 그 과정에서 관람객의 행위들이 쌓이고 쌓여 작품이 끊임없이 변형되며 완성되는 되겠죠.
친구의 예상대로 저는 파마지 작품을 보고 놀랐습니다. 심지어 저는 마크 브래드포드에게서 베르메르의 ‘빛’을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베르메르가 ‘우유 따르는 하녀’에게 성스러운 빛을 부여했듯이, 브래드포드는 ‘도시의 쓰레기’들에게 장엄한 지위를 부여했구나 생각습니다.
예술가 직관에 따라 그려진 멋지거나 예쁜 그림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쉽게 버려지는 파마지를 겹겹이 붙이고 다시 사포질로 갈아내는 브레드퍼드 작업 방식은, 상처 입은 도시의 피부를 어루만지는 예술가의 ‘야심차게 거룩한 노동’에 가깝죠. 직접 가서 보시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그냥 종이 쪼가리들을 붙였는데, 멀리서 보면 마치 오래된 벨벳이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깊은 빛을 뿜어내거든요. 그게 얼마나 대단한 역설로 다가오는지 느껴보셔야 합니다. 멀리서 보면 화려하고 아름다운데 가까이 가서 보면 찢어지고 긁히고 닳아 있는 상처의 흔적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내 발로 걸어봐야 합니다.
그런데 혹시 생각해 보셨나요? 마크 브레드퍼드는 가난한 동네의 흑인이고 게이이며 노동자였습니다. 그런 자가 버려지는 재료로 물감도 안 쓰고 어떻게 회화사의 한복판으로 걸어들어 갔을까요? 어느 인터뷰에서 했던 표현대로, 그는 변두리에 밀려난 사람이었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고, 그래서 역설적으로 자유가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뭐 어때? 내 눈에는 이 파마지가 이 전단이 더 예술적으로 보이니까 나는 이걸 쓸 거고, 이걸로 정중앙에 오를 거야.” 그리고 그 버려진 재료가 달라 보일 때까지 계속 시도했습니다. 정성과 시간을 들여 그 싸구려 재료에서 베르메르로 대표되는 고전 회화의 빛이 나올 때까지 계속하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전시로 푼 게 바로 지금 아모레퍼시픽에서 한 달 더 연장 전시하기로 한 ‘마크 브래드포드: 킵 워킹’ 전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서 보세요. 제 말처럼 이곳에 정말 보잘것없는 것들의 장엄함이 있는지, 파마 종이에서 정말 베르메르의 빛이 나오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