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지갑 연다…잘 차린 한 상, 그런데 눈으로 먹는 Miniature
<케이팝 데몬 헌터스> 속 녹색 마블링 접시에 담긴 김밥, <오징어 게임>의 달고나, 각종 김치와 떡볶이, 불고기, 냉면은 물론 ‘치맥’과 삼겹살 한상차림까지 한식이라면 없는 게 없다. 단, 모두 손톱만 하다. 핀란드, 캐나다, 일본, 태국 등 국제적인 단골을 거느린 이곳은 서울 북촌의 작은 마그넷 가게 ‘마그나라’다.
작업대 앞에 있던 옥경인 사장은 “스트레칭할 수 있는 시간”이라며 자리에서 일어나 호기심 많은 손님의 질문을 차분히 받아냈다. 문화예술 분야 컨설팅업체 연구원으로 일하던 그는 잦은 해외 출장을 다니면서 한국 기념품에 찍힌 ‘메이드 인 차이나’ 문구가 늘 마음에 걸렸다고 했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관련 행사에서 처음 접한 미니어처의 세계는 그를 마그넷 제작자의 길로 이끌었다. 당시 전문 디자이너를 수소문했지만 제작 물량과 기간이 맞지 않았다. “안 팔릴 것”이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고, 값싼 중국산 기념품의 물량 공세도 벽이었다. “아르바이트생조차 배우지 않겠다고 해서 제가 배웠어요. 미니어처 제작을 가르친 선생님조차 상업성이 없다고 말렸거든요.” 미니어처 한복 마그넷과 한글 시리즈를 자체 개발한 뒤, 다음으로 선택한 것이 ‘한식’이었다.
한국 여행의 추억마저 ‘중국산’?
‘메이드 인 코리아’ 나섰다
옥경인 사장의 한식 마그넷
한식 마그넷 전문숍 마그나라의 옥경인 사장이 특수 점토로 길이 1㎝도 채 안 되는 콩나물 모양을 빚은 뒤 노란색 아크릴물감으로 콩나물 머리를 칠하고 있다.
여행지 마그넷은 보통 가볍고 저렴한 기념품이다. 반면 미니어처는 손이 많이 가는 공예품이다. 옥 사장은 “외국인의 잔돈을 긁겠다”는 농담 같은 콘셉트로 꾸준히 미니어처 한식상을 차려나갔다. 그렇게 시작한 지 4년, 지금까지 만든 한식 종류만 300여종에 이른다.
김밥만 해도 막 말아놓은 김밥, 은박지에 싼 김밥, 도시락 김밥, 충무김밥까지 제각각이다. 3000원을 추가하면 요즘 유행하는 키링으로도 만들 수 있다. 음식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느냐고 묻자 그는 웃으며 말했다. “배(달의)민(족)을 봐요.” 동시대 한국인이 즐겨 먹는 음식을 보여주는 확실한 데이터다.
손톱만 한 음식 하나에 적게는 1만원대, 반찬을 이것저것 올려 푸짐한 상차림은 10만원대에 판매한다. 가격표 앞에서 잠시 망설이다 내려놓는 손님도 있지만, “너무 싸게 판다”며 팁을 놓고 가는 외국인도 있다.
돼지머리가 올라간 고사상 미니어처(아래 사진)는 개업 선물로 인기가 좋다. 한때 손님의 6할이 외국인이었지만, 요즘은 내국인도 부쩍 늘었다.
고사상 미니어처
“자국에서는 안 먹는데 한국에 와서 처음 먹고 인상 깊었던 음식을 주로 사가세요. 프랑스인들은 의외로 순대를 많이 사고, 일본인들은 어묵과 삼계탕을 좋아해요. 떡볶이, 김밥뿐 아니라 냉면이나 육회도 인기고요. 교포분들은 한식 마그넷을 냉장고에 붙여두면 그렇게 기분이 좋대요. 명절에는 송편 미니어처를 만들어 서비스로 드리기도 해요.”
가게는 상점이라기보다 작은 전시장에 가깝다. 들여다볼수록 ‘발견’이 이어져 한번 발을 들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김장 현장을 재현한 대작 앞에서는 절로 탄성이 나왔다. 갓 버무린 듯한 쪽파김치, 수육이 익어가는 가마솥 등 디테일이 집요하다. 아스파라거스의 비늘을 눈으로 좇다가는 그만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하루에 몇점이나 만드느냐는 질문에 옥 사장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도 그럴 것이 식당에서 주문받듯 메뉴 하나를 뚝딱 차려내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식재료 밑 작업에 오랜 시간을 할애하기 때문이다. 비빔밥 한 그릇에 길게는 2주가 걸린다. 미리 ‘부쳐놓은’ 계란프라이와 분홍소시지 부침은 손가락 끝으로 잡기조차 쉽지 않다.
0.7㎜ 길이 콩나물·애호박 등
각각 만들고, 담아내는 것도 일
비빔밥 한 그릇 나오는 데 2주
“ ‘노가다’ 익숙하지 않으면 못해요”
옥 사장은 콩나물 만들기를 이어갔다. 특수 점토를 잘게 잘라 손가락으로 밀어 0.7㎜ 남짓한 길이의 콩나물을 만든 뒤 노란 아크릴 물감으로 머리를 칠한다. 50그릇을 만든다 치면, 핀셋으로 당근·애호박 등 고명을 줄 세워 담는 데만 3일이 걸린다. 레진을 덮어 굳히는 데 하루가 걸리고, 수저를 래커로 칠하고 자석을 붙여야 비로소 완성된다. 새우나 게는 직접 만든 몰드로 찍고, 김은 기름종이를 세 번 채색해 만든다. 깻잎과 배춧잎처럼 잎맥이 섬세한 재료에는 꼬박 일주일을 쓴다. 옥 사장은 가장 힘든 공정으로 점토가 적당히 굳었을 때 실처럼 가늘게 채를 써는 작업을 꼽았다. 굳은 점토는 돌처럼 단단해 면도칼 10개들이 한 통이 금세 닳는다.
마그나라 내부 어디에도 ‘촬영 금지’ 문구가 없다. ‘업계 사람’처럼 보이는 이가 눈치를 보며 사진을 찍어도 제지하지 않는다. “이 작업은 ‘노가다’에 익숙하지 않으면 못해요.” 혹은 베껴도 상관없을 만큼 완성도에 자신이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미니어처 1급 자격증을 딴 그는 지금도 매주 스승을 찾아간다. 화요일은 온전히 작업의 날이다. 요즘은 전통 악기 미니어처를 만들고 있다. 대화 중 자연스럽게 ‘사장님’이 ‘작가님’으로 호칭이 바뀌자 그는 손사래를 쳤다. “상업적으로 하는 거라 작가는 아니에요.” 그러면서도 2028년 영국에서 전시회를 하고 싶다는 꿈은 감추지 않았다.
“궁중연회 미니어처를 만들어보려고 선생님과 상의 중이에요. 다대포 횟집, 조선팔도 국밥 세트도 구상하고 있고요.”
직원 한 명을 두고 있지만 대량 생산은 불가능해 온라인 판매는 엄두도 못 낸다. 납품처는 부산 김해공항 기념품 전문점 ‘갈매기상점’과 경기도의 한 봉안당, 단 두 곳이다. 미니어처 한식의 뜻밖의 용도는 고인을 위한 상차림이다.
“봉안당용 음식 제작 요청이 들어오면 유명 핸드메이드 플랫폼의 작가를 추천해요. 그런데 사연이 있으면 제가 해드려요. 폐렴으로 먼저 떠난 아이가 좋아했다는 마라탕, 손녀가 생전에 먹고 싶어 했다는 설렁탕 같은 것들요.”
완성된 음식 사진을 확인한 가족은 “위안이 된다”는 답을 보내왔다. 옥 사장은 언젠가 어린이를 위한 미니어처 공부방을 열고 싶다고 했다. 어른이 배울 곳은 많지만, 초등학생이 배울 곳은 드물기 때문이란다. 작고, 깨지기 쉽고, 갖고 싶은 것 천지인 이 가게가 노키즈존이 아닌 이유이기도 하다.
냉장고 문 위에 붙은 손톱만 한 한식 한 접시.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여행의 기억이고, 누군가에게는 먼저 보낸 가족을 향한 위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