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달 30일 서울고법에서 열린 ‘사법농단’ 사건 항소심 선고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고법이 지난달 30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의 재판개입(직권남용) 일부 혐의를 유죄로 판단해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각각 선고했다. 1심 법원은 ‘직권 없으면 직권남용도 없다’며 모든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으나 항소심 재판부가 일부를 뒤집은 것이다. 헌정사상 전직 대법원장이 형사재판에서 유죄를 받은 첫 사례다. 형식논리보다 재판 독립을 침해할 실질적 가능성을 따진 상식적인 판결이라고 본다.
서울남부지법 민사재판부는 2015년 사학연금법에 대해 한정위헌 결정을 구하는 위헌심판을 헌법재판소에 제청했다. 이에 양 전 대법원장은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을 통해 한정위헌을 구하는 위헌심판 제청을 취소하고 단순 위헌 여부를 따지는 위헌심판 제청을 해달라고 재판부에 압력을 행사한 혐의를 받는다. 한정위헌은 법 조항은 위헌이 아니지만 특정한 해석·적용은 위헌이라는 것으로, 대법원은 ‘헌재의 한정위헌 결정이 법원의 법 해석 권한을 침해한다’는 입장이었다. 양 전 대법원장은 옛 통합진보당 의원들이 낸 지위확인 소송을 각하한 1심 결과를 뒤집도록 항소심 재판부에 영향력을 행사한 혐의도 있다.
1심 재판부는 “재판개입이 명백하다”면서도 양 전 대법원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장은 사법행정권만 있을 뿐 재판개입 권한이 없으니 직권남용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법리를 내세웠다. 반면 2심 재판부는 “실질은 재판에 개입하거나 영향을 미쳐 법관의 재판상 독립을 침해하는 것으로 직권남용에 해당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오히려 더 중하게 보호해야 하는 ‘재판사무의 핵심영역’에 대한 행위는 언제나 직권남용죄가 성립하지 않는 결론에 이르러 재판 독립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는 모순에 빠진다”고 1심 판결을 비판했다. 사법행정을 통한 재판개입에 경종을 울린 판결이라고 할 만하다.
인사권을 가진 대법원장이 개별 재판에 대해 압력을 행사하면 법관이 압박을 받으리라는 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도 대법원을 비롯한 사법부는 그동안 사법농단 사건 재판에서 사법행정권 남용이 재판 독립을 침해할 실질적 가능성을 따지기보다 ‘직권 없으면 남용도 없다’는 형식논리를 내세워 무죄 판결을 써왔다. 일반 상식과 동떨어진 이런 ‘제 식구 감싸기’식 판결이 사법불신을 더욱 키웠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판결은 사법신뢰 회복이라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사건을 넘겨받을 대법원이 상식과 실질에 맞는 전향적 판례를 만들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