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에서 글라우콘은 ‘정의’를 인간이 불의를 당하지 않기 위해 체결한 상호 불가침의 합의로 설명한다. 정의는 그 자체로 선택되는 선이 아니라, 최악의 상태를 피하기 위한 차악의 선택이며, 법은 이러한 합의를 강제하는 제도적 장치에 불과하다. 이 정의관은 홉스, 로크, 루소를 거쳐 우리가 아는 사회계약론으로 이어진다.
사회계약은 정의를 정치 질서의 조건으로 이해하며, 인간 삶의 목적은 정의의 외부에 둔다. 이 점에서 사회계약론은 정의를 목적이 아니라 사회의 전제로 이해하는 이론적 전통이라 할 수 있고, 따라서 자연스럽게도 최선의 정의가 추구되는 것은 논의의 핵심이 아니다. 권리를 침해받는 인간은 참해 이전에 보편적으로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두 가지 질문이 생긴다. 첫째, 우리는 권리를 행사하거나 이를 뒤집어 의무를 행할 때 사회계약에 따른 모종의 정의를 경험하는가. 즉 계약론적 정의는 사회적 효능감이 적실한가. 둘째, 권리·의무 주체로서 인간의 조건은 보편적이고 불변하는 것인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각자가 내리는 것이 맞을 수 있다. 다만 부분의 합이 곧 전체로 치환되지는 않는다. 집단지성의 발전적 동력을 믿는다면 반성적 사고와 사회적 평가는 불가피하다. 주지하듯 사회가 분화되고 개인 간 관계가 복잡해질수록 갈등은 더욱 첨예해진다. ‘법은 최소한’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법적 분쟁은 늘어나지만, 사회적 정의가 그만큼 더 잘 구현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과연 법이 더 정교해진다면 이 문제가 해결될 것인가.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인공지능에 대한 논의로 이어가보자. 노동으로 수익을 얻는 모두가 자신이 대체될 수 있는가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본 작금이다. 실제로 2024년 모 은행의 콜센터 노동자들이 인공지능의 도입으로 대거 해고되는 사건이 있었다. 반면 해고되지 않은 이는 자신마저 대체할지 모르는 인공지능에 노하우를 전수하는 업무와 인공지능 상담을 거쳐 자신에게까지 온 진상 고객을 상대해야 하는 고강도 업무를 맡게 됐다. 우리는 어떻게 이런 문제를 풀어갈 것인가. 이런 사안은 다른 직종에서도 조용히 그러나 빠르게 확장되는 중이다.
요컨대 계약론적 정의는 권리 침해가 발생했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데 효과적이었지만, 사회가 발전하고 권리·의무 관계가 고도로 복잡해지면서 모종의 한계를 노정한다.
또한 복잡해진 사회와 기술의 발전은 계약론적 정의관이 전제해 온 인간상과 법의 기능에 질문을 제기하는 중이다. 특히 알고리즘에 의한 채용, 신용평가, 복지 결정, 형사 사법 보조 판단은 계약 위반이나 명시적 권리 침해 없이도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삶의 가능성을 구조적으로 제한할 수 있다. 이때 문제는 누가 누구의 권리를 침해했는가가 아니라, 어떤 삶의 경로가 제도적, 관행적으로 닫혀버렸는가에 있다. 그러나 계약론적 정의는 주로 사후적 책임 귀속과 침해 판단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이러한 조건의 형성 자체를 문제의 중심에 두는 데 한계를 지닌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새로운 정의 개념이 필요해진다.
복잡해진 사회 제도와 네트워크, 발전한 기술과 새로운 환경 속에서 ‘누구의 책임인가’를 묻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이제 필요한 질문은 책임의 귀속이 아니라,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이 점점 불가능해지고 있는가로의 전환이다. 사회적 정의가 더 이상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침해를 교정하는 최소한의 합의에 머물러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의는 이제 인간의 삶의 가능성이 어떻게 형성되고, 또 어떻게 제한되는지를 성찰하는 시대적 과제로 이해돼야 한다. 이처럼 급변하는 시대에 헌법 10조가 말하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 그리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는 결국 이러한 ‘정의’의 토대와 긴밀히 연결돼 있다.
이기병 한림대의대 내과교수 의료인류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