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정치는 여전히 힘의 세계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의 전쟁이나 미국과 이란 간 고조되는 긴장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빠르게 성장하는 중국, 그것을 저지하고 패권국의 위치를 계속 움켜쥐고 가려는 미국, 이 둘 사이에서 자신의 파이를 지키고 키우려는 유럽, 모두가 경제발전에 획기적인 기여를 할 새로운 기술과 더 강력한 군사력을 갖기 위해 달리고 있다. “결국 국력”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시대이다.
이런 상황에서 요즘 한국 사회에는 묘한 조급함이 흐른다. “아직 부족한가, 더 올라가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에게 이제 내려올 일만 남지 않았는가.” 국가 상실부터 극한 빈곤까지 힘이 없는 나라의 온갖 비참함을 다 겪으며 여기까지 올라온 나라이다보니 내려가는 것에 대한 공포가 아주 크다. 그럴수록 더 높은 경제성장률, 더 뛰어난 기술, 더 강한 군사력, 이 모든 것에 대한 열망이 정부의 국정계획에서부터 각종 미디어와 학자들의 출판물에까지 활활 타오른다. 코스피 지수는 얼마나 상승했는가? 한국의 국내총생산(GDP)은 몇위인가? 한국의 인공지능(AI) 기술은 몇위쯤 되는가?
코스피 지수·GDP·AI 국가 순위…
정부의 시선 ‘숫자’ 머물러선 안 돼
사회 정의·불평등 해소 ‘내실’ 중요
이 대통령, 개혁의 큰 그림 그려야
확실히 이런 지표들은 중요하다. 특히 정치와 경제 전반에 걸친 전반적 침체에서 나라를 일으켜야 하는 지금의 정부에는 아주 중요하다. 그러나 이런 숫자와 순위표 뒤에 있는 복잡한 사회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더 중요하다. 정부의 시선이 단지 숫자의 증감과 순위의 등락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과거 우리가 가난하던 시절, 후진국이던 시절, 한국 사회가 국력의 숫자에 집착했던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일단 키우고 올려야 한다는 것이 설득력을 가졌다. 그러나 지금의 대한민국은 그런 성장의 논리만으로는 설명할 수도, 이끌어갈 수도 없다.
주식시장이 불붙고, 인공지능과 로봇산업을 한국의 기업들이 주도하고, GDP와 수출이 우상향 곡선을 그리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미래에 대한 우리의 불안도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그 과실을 사회 전체로 어떻게 확산시킬 것인가에 대한 계획이 없다면 그 모든 성장은 반쪽이다. 주거 비용 급등, 안정적인 일자리의 감소, 정규직과 비정규직,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격차, 이런 상황 아래 고통받는 시민들에게는 “국력이 강해졌다”는 말이 별로 와닿지 않을 것이다.
국력을 외부와의 경쟁과 충돌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능력으로만 보는 것은 너무 좁은 시각이다. 국가가 성장할수록 국력은 오히려 내부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능력에서 나타난다. 사회가 공정한 게임의 룰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지, 불평등 문제는 어떻게, 어느 수준에서 관리되고 있는지,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와 제도가 얼마나 존중받고 있는지, 시민들 상호 간, 그리고 제도에 대한 신뢰는 어느 정도인지, 이 모든 것이 국력이다.
이런 차원에서 한국을 정말로 강한 나라로 만들려면 몇개의 법을 바꾸는 이상의 노력과 지혜, 결단력이 필요하다. 문제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아주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한다. 규제 이상의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제도 자체를 재설계하고 생각 자체를 바꿔야 하는 부분도 있다. 이제껏 가지 않은 길을 가야 하는 만큼 불확실성도 훨씬 크다. 한국 사회가 맞닥뜨린 많은 문제들, 즉 노령화와 삶의 불안정성, 청년실업 등은 우리보다 먼저 선진국의 길을 걸어간 다른 나라들도 속시원히 해결하고 있지 못하는 오랜 골칫거리들이다. 딱히 베껴 올 모범 답안이 없다는 뜻이다.
각종 여론조사와 선거에서 끝없이 평가받을 수밖에 없는 정부로서는 이런 지루한 싸움에 매달리는 것이 그다지 매력적일 수 없다. 그러나 정말 성공한 정부로서 평가받고자 한다면 피할 수 없는 싸움이기도 하다. 많은 시민이 지금의 대통령에게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키를 넘겨준 이유는 그런 과감한 도전을 제대로, 멋지게 벌여주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지난달 31일 대통령은 부동산 시장 정상화를 두고 코스피 5000 올리는 일보다 쉽고 중요한 일이라고 소셜미디어에서 밝히며 자신감과 사명감을 드러냈다. 표계산 없이 국민을 믿고 비난만 감수하면 될 일이라고 결연한 의지도 밝혔다. 규제나 정책적 인센티브가 단기적으로 가져다 줄 수 있는 효과를 믿고 한 말은 아니기를 바란다. 대한민국의 틀을 새롭게 짜기 위한 큰 그림의 일부분이기를 기대한다. 구조를 바꾸는 큰 개혁의 시작이기를 바란다. 강한 대한민국, 그야말로 ‘누구라도 건드리면 패가망신’하는 대한민국은 그런 개혁의 열매로서만 가능할 것이다.
윤비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