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변함없이 ‘성장’이 화두다. 새해 첫날 대통령 신년사에 나온 ‘다섯 가지 대전환의 길’은 ‘지방 주도 성장’ ‘모두의 성장’ ‘안전이 기본인 지속 가능한 성장’ 등 모두 ‘성장’이다. 이전과 다른 성장을 강조하지만 ‘어쨌든 성장’이다. 그런데 성장의 실체와 결과를 외면한 탓에 성장 문구는 그럴듯한데 공허하다.
부와 불평등 함께 늘리는 ‘성장’
제2차 세계대전 후 30년가량의 고도성장기를 빼면, 성장은 부와 함께 불평등도 늘렸다. 토마 피케티가 <21세기 자본>에서 실증했듯이 성장이 둔화하면 불평등의 골은 깊어지는데, 우리는 오래전에 저성장 시대로 접어들었다. 저성장 시대에 불평등을 줄이려면 증세가 답이지만 의지가 별로 보이질 않으니 ‘모두의 성장’은 ‘그들만의 성장’, 빛 좋은 개살구일 공산이 크다.
생산과 소비 증대로 이뤄지는 성장은 자연에서 ‘더 많은’ 물질을 채굴하여 ‘더 많은’ 상품을 생산하고 소비해 결국 ‘더 많은’ 쓰레기를 만든다. 성장을 거듭하면 자연의 자원 생산력과 쓰레기 흡수력, 곧 생태적 수용력을 넘는 때, 성장으로 쌓이는 생태적 부담을 감당할 수 없는 때가 반드시 온다. 기후위기나 갈 곳을 찾아 헤매는 수도권 쓰레기는 그때가 가까워졌다는 경고다. ‘지속 가능한 성장’은 모순어법인 데다 불가능하다.
저성장 시대, 획기적인 성장 동력으로 열광적인 환호를 받으며 시대의 총아로 등극한 인공지능(AI)은 그러나 시대의 문제아가 될 가능성도 크다. 연초 현대차 그룹은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를 공개하고 향후 생산 현장 투입 계획을 밝혔고 노조는 강하게 반발했다. ‘피지컬 AI’가 가시화되며 고용 불안이 현실이 되었다. AI 낙관론자들이 말하듯 ‘고용 없는 성장’은 기우에 불과할까.
AI는 일자리는 물론 삶 자체를 잡아먹을 기세다. AI 구현에 필요한 반도체와 데이터센터는 ‘전기 먹는 하마’다. AI를 키우려면 어떻게든 늘어난 수요만큼 전기를 더 생산해야 한다. 지금 계획대로라면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전력 수요는 최대 16GW다. 앞으로 폭증할 전력 수요에 대비한다며 정부는 고리2호기 수명 연장을 승인했고 다른 노후 핵발전소(원전)도 수명 연장을 추진하고 있다. 신규 원전은 급조한 2번의 정책토론회와 1번의 여론조사로 공론화 절차를 일사천리로 해치우고 건설을 결정했다.
이런 무리수로 ‘AI 강국’이 된다고 하자. 하지만 그런다고 원전이 위험하다는 진실이 변하지는 않는다. 수명 다한 원전을 계속 돌리고 원전을 새로 지어 이룬 성장이 ‘안전이 기본인 성장’일 수 없다. 모두가 꺼리는 위험한 시설인 원전을 어디에 지을 건가? 전기가 필요한 용인에 지을까? 그럴 리가 없다. 원전 예정지로 지정된 곳은 극심한 갈등을 겪는다. 영광과 울진, 삼척과 영덕이 보여주었다. 지역에서 생산한 전기를 용인으로 보낼 송전선로는 산 넘고 물 건너, 마을을 가로지르며 지역의 삶과 자연을 망가뜨린다. 밀양과 청도가 보여주었다. 지역 공동체를 파탄에 빠뜨리고 일군 성장이 ‘지방 주도 성장’일 수 없다.
지속 가능한 삶은 ‘성숙’으로부터
‘공동체(community)’는 ‘선물(munus)’을 ‘함께(com)’ 나누는 곳이다. 그래서 우리 삶은 공동체에 있을 때 안정되고 안전하다. 생산과 소비를 늘려 성장할수록 삶은 더 많은 상품으로 꾸려진다. 삶에서 상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면 선물의 영역이 줄어들고 공동체는 위축된다. 공동체가 약해져 삶이 불안정하고 불안해지면 상품에 더 의존한다. 악순환이다.
상품은 돈으로 사야 하기에 이제 돈 없는 삶은 상상하기 힘들다. 돈이 중심인 세상은 무엇이든 돈으로 환산하고 평가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공동체와 자연, 아름다움과 고요함 등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 ‘코스피 5000’으로 대체할 수 없는 것이 많다. 그런데도 상품화가 진전되면 이런 것마저 돈으로 환산하여 평가하거나 무시해버린다. 여기에 오늘 우리 위기의 뿌리가 있다.
성장이 아무리 중요해도, 성장이 전부는 아니다. 사람 키가 계속 크지 않고 몸무게가 계속 늘지 않는 건 비정상이 아니라 정상이다. 어느 정도 성장한 후 필요한 것은 성장이 아니라 성숙이다. 무한정 지속할 수 없는 성장만 고집하는 건 어리석다.
우리는 왜 성장만 말하고 성숙은 얘기하지 않는가? 개인이 성숙해져야 하듯이 사회도 성숙해져야 한다. 성장은 한계가 있어도 성숙은 한계가 없다.
우리 삶이 힘든 이유가 도로와 자동차가 부족한 탓인가? 도로와 자동차를 더 많이 만들면 세상이 살기 좋아질까? 경제의 어원인 ‘오이코스(oikos·집)’는 경제가 성장이 아니라 삶을 위한 것이라고 알려준다.
자연의 질서는 지속 가능성이 축적과 성장이 아니라 순환과 멈춤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해준다. 이러한 진실을 알아듣고 받아들이는 능력이 성숙이다. 모두가 풍요롭고 안전하고 지속 가능한 삶은 성장이 아니라 성숙과 함께 온다.
조현철 신부·서강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