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덕에 나 인생 만날 봄이었습니다.”
울며 웃으며 몰아봤던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속 주인공 오애순의 시 구절이다. 제주 방언으로 “수고 많으셨습니다”라는 뜻의 제목처럼, 이 드라마는 각자의 속도로 삶의 계절을 건너가는 모습을 그려낸다. 꽃이 만개하며 설렘을 주는 봄, 푸른 잎이 무성해지는 여름, 결실을 맺으며 붉게 물드는 가을, 그리고 찬 바람 속에서 대지가 숨을 고르는 겨울까지. 그렇게 드라마 속 인물들이 나이 들어가며 건너는 각자의 계절은 우리의 삶과도 자연스럽게 포개진다.
배우 이준호가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남긴 “나의 계절은 좀 늦게 올 뿐이다”라는 고백은 마음에 인상 깊게 남아 있다. 나이는 한 방향으로 흐르지만, 마음의 계절은 각자 다른 속도로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스무 살, 마흔, 예순 같은 숫자에 집착하지만, 실제 삶은 그렇게 또렷하게 잘려 나뉘지 않는다.
삶을 계절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감성적인 표현에 그치지 않고 연구로도 존재한다. 미국의 심리학자 대니얼 레빈슨은 저서 <남자가 겪는 인생의 사계절>과 <여자가 겪는 인생의 사계절>에서 인생의 전 과정을 봄·여름·가을·겨울의 사계절로 설명했다.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는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고, 성인 초기는 에너지와 가능성이 무르익는 여름이다. 중년기는 삶의 결실을 돌아보며 균형을 찾는 가을이며, 노년기는 지나온 시간을 정리하고 삶을 마무리해 가는 겨울이다.
각 계절은 비교적 안정적인 흐름을 가지지만, 계절이 바뀔 때 환절기가 오듯 인생에도 전환기가 찾아온다. 지금의 방식이 더는 꼭 맞지 않는다는 불안과 혼란이 찾아오는 시기다. 레빈슨은 이를 위기가 아니라 다음 계절로 넘어가기 위한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보았다. 봄에서 여름으로,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듯 삶도 그렇게 계절을 바꿔 간다는 것이다.
레빈슨은 노년기를 겨울에 비유했지만, 실제 노년심리 연구 현장에서 만난 삶에는 겨울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여든의 나이에도 중국어를 새로 배우며 다시 무언가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인생의 봄을 살고 있었고, 누군가는 서른의 나이에 깊은 상실과 혼란 속에서 긴 겨울을 보내고 있었다.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팔순을 넘긴 배우 선우용여는 ‘지금 인생의 사계절 중 어디쯤 와 있느냐’는 질문에 망설임 없이 “봄”이라고 답했다. 인생에서 겨울이 오고 난 뒤에는 봄도 반드시 온다고 덧붙였다.
인생의 봄은 희망과 함께 찾아온다. 실패와 상실 뒤에 혹은 오래 멈춰 있던 자리에서 다시 무언가를 해보고 싶어질 때, 그 순간이 바로 인생의 봄이다. 여름은 가장 뜨겁고 치열한 시기다. 뙤약볕 아래서 무성한 잎을 틔우듯 해야 할 일과 책임으로 가득 차 숨이 가쁘지만 돌아보면 내가 분명히 살아 있었다는 감각이 가장 선명한 시기다. 마음속에 가을이 오면 삶의 속도는 자연스럽게 느려진다. 붉게 물든 단풍처럼 인생의 결실을 확인하며 더 많이 쌓기보다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의미가 더 중요해지는 시기다. 겨울은 찬 바람 속에서 대지가 숨을 고르듯,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고 가장 본질적인 것만 남기는 시간이다. 겨울은 모든 것이 끝나는 계절이 아니라, 다음 순환을 위해 생명력을 응축하는 계절이다.
노년이 겨울일 수는 있다. 하지만 삶은 순환하기에 노년기에도 문득 봄날 같은 설렘이 찾아오고, 한창인 중년에도 잠시 겨울 같은 고독이 머물다 가기도 한다. 우리는 평생에 걸쳐 여러 번의 사계절을 경험한다.
인생의 계절은 결국 마음의 몫이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속 오애순의 인생은 늘 봄이었다는 시구처럼, 계절은 나이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달려 있다.
지금 당신의 인생은 어느 계절을 지나고 있는가.
김기연 중앙대 심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