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6~7㎞ 정도 걸은 지 7년이 넘었다. 만 보가 채 못 되는 거리라 운동이라 하긴 뭐하지만, 꾸준히 하고 있어 적잖이 뿌듯하다. 지속하고 있다는 사실이 역설적으로 지속하는 힘이 되어주는 것이다. 그저께 밤에는 한 차례 뛰기도 했다. 천변을 걷는데 난데없이 맵싸한 강풍이 불어왔다. 머리끝에 고드름이 달리는 것 같았다. 고드름이 달리지 않게 하려면 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2㎞ 정도 뛰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호흡을 가다듬는 데 시간이 제법 걸렸다. 돌이켜보니 이렇게까지 뛰어본 게 언제인지 아뜩했다. 건널목에서 전력 질주를 한 적은 있었으나 도착이라는 목적 없이 달린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장마철이나 폭설이 내릴 때면 별수 없이 걷는 일을 거른다. 그런 날이면 온몸이 찌뿌드드하다. 좀과의 곤충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좀이 쑤신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다.
지난 몇년간 걷는 몸, 움직이는 몸이 만들어진 셈이다. 건강을 위해 걷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고자 걷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일과에서 걷기가 빠지지 않는다. 고민이나 걱정을 떨치는 데 걷기가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요즘은 걸을 때 주위를 살피려고 애쓴다. 저마다의 빛깔을 드러내는 삶의 조각들이 거기에 있었다. 시선이 분산되다가 집중되고 시야가 넓어지다가 트일 때마다 길이 주는 가르침이 있었다.
얼마 전에 한 독서 모임을 준비하신다는 분께서 물으셨다. “그동안 내신 책이 많아서 무슨 책을 함께 읽으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20년 넘게 쓰는 일을 해왔더니 그간 출간된 책들이 열 권이 넘는다. 모임의 성격을 듣고 내 책 중 한 권을 조심스레 추천하는데, 이런 질문이 이어진다. “어쩜 그렇게 계속 쓸 수 있어요?” 신선하면서도 난감한 질문이었다. “계속 쓰니까 계속 쓰게 되는 것 같아요.” 대답하면서도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다시 생각해도 저것보다 나은 답을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쓰는 몸 또한 걷는 몸과 같아서 나를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게 한다. 골똘히 생각에 잠기게 한다. 알 듯 말 듯 한 무언가를 잡으려 애쓰게 한다. 쓰는 나는 보통 앉아 있지만 그때마다 움직이고 있다고 느낀다.
“한번 쓰는 몸이 만들어지면 쓰는 일이 쉬워지나요?” 그렇다고 시원하게 말하고 싶었으나 섣불리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쓰는 일은 애쓰는 일 같아요. 말 그대로 몹시 수고로운 일이죠. 사랑을 뜻하는 애이기도 하겠네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쓰게 되니까요. 내 안의 동심, 그러니까 호기심을 끌어낸다는 점에서는 아이를 뜻하는 애이기도 할 거고요.” 그동안 나는 애를 쓰고 있었던 셈이다. 계속해서 애를 쓴 덕분에 뭔가를 써야 하는 일이 익숙해진 것뿐이다. 백지를 마주할 때마다 머릿속이 백지장이 되지만, 그 백지장에 망설이며 발걸음을 내는 게 쓰는 일일 것이다.
“저는 스스로가 가장 큰 벽이에요. 제가 지금껏 써왔던 글들이 벽돌처럼 쌓인 벽이죠. 지금까지 안 썼던 것을 써야 하잖아요. 더 잘 쓰고 싶은 마음도 크니, 가장 쓰기 어려운 때도 바로 지금이죠. 앞으로 더 어려워질 테고요.” 이 말을 하면서 나는 익숙한 어려움에 대해 생각했다. 매일 걷기, 글쓰기, 말하기, 인간관계, 그리고 생활. 생각보다 쉽게 벽을 넘을 때도 있지만, 그보다 더 자주 맥없이 미끄러지거나 나가떨어지는 내 모습이 그려졌다. 그러나 이 어려움 때문에 나는 계속 쓰는지도 모른다. 계속 쓰기 위해 애쓰는지도 모른다. 어려운 일을 여봐란듯이 해내고 싶으니 말이다.
햇수로 7년과 25년, 생활에 필요한 활동을 제외하고는 가장 오랫동안 한 일이 걷기와 쓰기다. 더 잘 걷는 일, 더 잘 쓰는 일이 요원하니 계속 걸을 뿐이다. 계속 쓸 뿐이다. 움직이는 사람에게는 매일이 내일이다.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오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