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내가 자란 시장에서는 그를 박스 아저씨 혹은 박씨 아저씨라고 불렀다. 그는 자전거로 박스를 날랐고, 우리 집 앞 골목 끝에서 실어온 박스들을 정리했다. 아이였던 나는 그가 주운 박스들이 어디로 가는지, 그 일을 하고 나면 무엇이 남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한겨울에 찬 바닥에 앉아 물건을 팔던 사람들처럼 골목에 쌓인 박스와 아저씨의 자전거 역시 내게는 지극히 당연한 풍경이자 삶이었다. 삶. 한 음절 안에 자음과 모음과 받침이 서로를 꽉 움켜쥐고 있는 단어. 나는 지금도 그 단어를 말할 때면 소쿠리에 담긴 채소나 바닥에 주저앉은 여자들, 박스를 자전거에 싣고 골목을 달리던 아저씨가 떠오른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어느 겨울이었다. 늦은 저녁,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컴컴한 골목 끝에서 하얗게 올라오는 입김을 봤다. 우리는 늘 그랬듯 짧은 인사를 나눴다. 그때 그의 이름을 물어봤더라면 좋았을 텐데. 얼마 후 그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 사람의 삶이 끝나자, 골목의 박스들이 사라졌다. 자전거와 입김도. 이제는 골목과 나만 아는 이야기가 되었다.
얼마 전 한 문학관에 전시된 작가의 육필 원고를 봤다. 유리 진열장 안에서 ‘삶’이라는 글자를 발견하자마자 불현듯 시장을 떠올렸다. 박스가 쌓여 있던 골목과 그 박스를 묶던 손, 자전거에 박스를 싣고 달리던 그 사람의 모습까지. 그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그 시장에는 여전히 내가 이름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름 대신 성이나 상호로 불리고, 더위와 추위에 이골이 난 사람들. 문학관 중앙에서 환한 조명을 받는 책을 바라보며 문학보다 절대 작지 않은 이들의 생을 기려줄 기념관을 상상해봤다. 어쩌면 나는 내가 어떤 삶을 기억해왔고 또 얼마나 많은 삶을 그냥 지나쳐왔는지를 묻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기록되지 않은 생은 어디에 두어야 할까. 그 질문은 언제나 나를 ‘시장’으로 데려간다. 더위와 추위를 견디던 얼굴들, 그들의 몸짓들, 삶은 반드시 어느 자리를 점유하며 지나가고, 우리는 이 삶의 시간이 축적된 곳을 장소라 부른다. 하지만 이 집단적이고 무의식적인 보관소는 영구하지 않다. 풍경이 바뀌고 자리가 정리되면 그곳에 쌓여 있던 시간도 함께 흩어진다. 장소가 더 이상 붙들 수 없는 것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 내가 아는 곳은 하나뿐이다. 벽과 유리가 없어도, 물질적 흔적이 사라져도 삶을 간직할 수 있는 자리, 바로 기억이다.
기억의 문을 열면, 그 안에는 나만 있지 않다. 가까운 사람들부터 이름을 알지 못한 사람, 풍경처럼 스쳐 지나간 사람들까지 모두 분명한 자리를 차지한다. ‘나의 삶’이라고 불리는 것 안에는 그렇게 수많은 타인의 삶이 서로를 꽉 움켜쥔 채 들어 있다.
나의 기억이 품은 타인, 타인의 기억이 품은 나. 인간이라는 말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뜻한다는 것을 떠올리면, 우리는 개별적으로 찍힌 점이 아니라 서로의 기억을 오가는 선인 것 같다. 그 선과 선을 이어 면을 만들고 그 안에 만나고 헤어지는 모든 인연을 담는 게 삶이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그렇게 하나의 장소가 되어가는 중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풍경이 있는, 언제나 돌아가게 되는 곳.
신유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