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80주년 경향신문

기억이라는 장소



완독

경향신문

공유하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X

  • 이메일

보기 설정

글자 크기

  • 보통

  • 크게

  • 아주 크게

컬러 모드

  • 라이트

  • 다크

  • 베이지

  • 그린

컬러 모드

  • 라이트

  • 다크

  • 베이지

  • 그린

본문 요약

인공지능 기술로 자동 요약된 내용입니다. 전체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본문과 함께 읽는 것을 추천합니다.
(제공 = 경향신문&NAVER MEDIA API)

내 뉴스플리에 저장

기억이라는 장소

입력 2026.02.04 19:50

수정 2026.02.04 22:33

펼치기/접기

그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내가 자란 시장에서는 그를 박스 아저씨 혹은 박씨 아저씨라고 불렀다. 그는 자전거로 박스를 날랐고, 우리 집 앞 골목 끝에서 실어온 박스들을 정리했다. 아이였던 나는 그가 주운 박스들이 어디로 가는지, 그 일을 하고 나면 무엇이 남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한겨울에 찬 바닥에 앉아 물건을 팔던 사람들처럼 골목에 쌓인 박스와 아저씨의 자전거 역시 내게는 지극히 당연한 풍경이자 삶이었다. 삶. 한 음절 안에 자음과 모음과 받침이 서로를 꽉 움켜쥐고 있는 단어. 나는 지금도 그 단어를 말할 때면 소쿠리에 담긴 채소나 바닥에 주저앉은 여자들, 박스를 자전거에 싣고 골목을 달리던 아저씨가 떠오른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어느 겨울이었다. 늦은 저녁,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컴컴한 골목 끝에서 하얗게 올라오는 입김을 봤다. 우리는 늘 그랬듯 짧은 인사를 나눴다. 그때 그의 이름을 물어봤더라면 좋았을 텐데. 얼마 후 그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 사람의 삶이 끝나자, 골목의 박스들이 사라졌다. 자전거와 입김도. 이제는 골목과 나만 아는 이야기가 되었다.

얼마 전 한 문학관에 전시된 작가의 육필 원고를 봤다. 유리 진열장 안에서 ‘삶’이라는 글자를 발견하자마자 불현듯 시장을 떠올렸다. 박스가 쌓여 있던 골목과 그 박스를 묶던 손, 자전거에 박스를 싣고 달리던 그 사람의 모습까지. 그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그 시장에는 여전히 내가 이름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름 대신 성이나 상호로 불리고, 더위와 추위에 이골이 난 사람들. 문학관 중앙에서 환한 조명을 받는 책을 바라보며 문학보다 절대 작지 않은 이들의 생을 기려줄 기념관을 상상해봤다. 어쩌면 나는 내가 어떤 삶을 기억해왔고 또 얼마나 많은 삶을 그냥 지나쳐왔는지를 묻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기록되지 않은 생은 어디에 두어야 할까. 그 질문은 언제나 나를 ‘시장’으로 데려간다. 더위와 추위를 견디던 얼굴들, 그들의 몸짓들, 삶은 반드시 어느 자리를 점유하며 지나가고, 우리는 이 삶의 시간이 축적된 곳을 장소라 부른다. 하지만 이 집단적이고 무의식적인 보관소는 영구하지 않다. 풍경이 바뀌고 자리가 정리되면 그곳에 쌓여 있던 시간도 함께 흩어진다. 장소가 더 이상 붙들 수 없는 것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 내가 아는 곳은 하나뿐이다. 벽과 유리가 없어도, 물질적 흔적이 사라져도 삶을 간직할 수 있는 자리, 바로 기억이다.

기억의 문을 열면, 그 안에는 나만 있지 않다. 가까운 사람들부터 이름을 알지 못한 사람, 풍경처럼 스쳐 지나간 사람들까지 모두 분명한 자리를 차지한다. ‘나의 삶’이라고 불리는 것 안에는 그렇게 수많은 타인의 삶이 서로를 꽉 움켜쥔 채 들어 있다.

나의 기억이 품은 타인, 타인의 기억이 품은 나. 인간이라는 말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뜻한다는 것을 떠올리면, 우리는 개별적으로 찍힌 점이 아니라 서로의 기억을 오가는 선인 것 같다. 그 선과 선을 이어 면을 만들고 그 안에 만나고 헤어지는 모든 인연을 담는 게 삶이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그렇게 하나의 장소가 되어가는 중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풍경이 있는, 언제나 돌아가게 되는 곳.

신유진 작가

신유진 작가

  • AD
  • AD
  • AD

연재 레터를 구독하시려면 뉴스레터 수신 동의가 필요합니다. 동의하시겠어요?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콘텐츠 서비스(연재, 이슈, 기자 신규 기사 알림 등)를 메일로 추천 및 안내 받을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레터 구독을 취소하시겠어요?

뉴스레터 수신 동의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서비스를 메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 동의를 거부하실 경우 경향신문의 뉴스레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지만 회원가입에는 지장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1이메일 인증
  • 2인증메일 발송

안녕하세요.

연재 레터 등록을 위해 회원님의 이메일 주소 인증이 필요합니다.

회원가입시 등록한 이메일 주소입니다. 이메일 주소 변경은 마이페이지에서 가능합니다.
이메일 주소는 회원님 본인의 이메일 주소를 입력합니다. 이메일 주소를 잘못 입력하신 경우, 인증번호가 포함된 메일이 발송되지 않습니다.
뉴스레터 수신 동의
닫기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서비스를 메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 동의를 거부하실 경우 경향신문의 뉴스레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지만 회원가입에는 지장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1이메일 인증
  • 2인증메일 발송

로 인증메일을 발송했습니다. 아래 확인 버튼을 누르면 연재 레터 구독이 완료됩니다.

연재 레터 구독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경향신문 홈으로 이동
뉴스레터 구독
닫기

전체 동의는 선택 항목에 대한 동의를 포함하고 있으며, 선택 항목에 대해 동의를 거부해도 서비스 이용이 가능합니다.

보기

개인정보 이용 목적- 뉴스레터 발송 및 CS처리, 공지 안내 등

개인정보 수집 항목- 이메일 주소, 닉네임

개인정보 보유 및 이용기간- 원칙적으로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목적이 달성된 후에 해당정보를 지체없이 파기합니다. 단, 관계법령의 규정에 의하여 보존할 필요가 있는 경우 일정기간 동안 개인정보를 보관할 수 있습니다.
그 밖의 사항은 경향신문 개인정보취급방침을 준수합니다.

보기

경향신문의 새 서비스 소개, 프로모션 이벤트 등을 놓치지 않으시려면 '광고 동의'를 눌러 주세요.

여러분의 관심으로 뉴스레터가 성장하면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 등의 매체처럼 좋은 광고가 삽입될 수 있는데요. 이를 위한 '사전 동의'를 받는 것입니다.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광고만 메일로 나가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뉴스레터 구독
닫기

닫기
닫기

뉴스레터 구독이 완료되었습니다.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
닫기

개인정보 이용 목적- 뉴스레터 발송 및 CS처리, 공지 안내 등

개인정보 수집 항목- 이메일 주소, 닉네임

개인정보 보유 및 이용기간- 원칙적으로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목적이 달성된 후에 해당정보를 지체없이 파기합니다. 단, 관계법령의 규정에 의하여 보존할 필요가 있는 경우 일정기간 동안 개인정보를 보관할 수 있습니다.
그 밖의 사항은 경향신문 개인정보취급방침을 준수합니다.

닫기
광고성 정보 수신 동의
닫기

경향신문의 새 서비스 소개, 프로모션 이벤트 등을 놓치지 않으시려면 '광고 동의'를 눌러 주세요.

여러분의 관심으로 뉴스레터가 성장하면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 등의 매체처럼 좋은 광고가 삽입될 수 있는데요. 이를 위한 '사전 동의'를 받는 것입니다.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광고만 메일로 나가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닫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