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사의 케케묵은 논쟁 중 하나는 국가와 종교의 관계다. 이재명 대통령이 특정 종교교단의 정치개입을 엄단할 것을 요청한 사실은 제정일치를 향한 인간 욕망에 대한 정면 도전이나 다름없다. 1905년 프랑스 제3공화국 헌법에 최초로 명시된 정교분리는 중세의 종교권력에서 비로소 국가가 독립한 것을 의미한다. 생각해보라. 불교·기독교·이슬람교와 같은 세계적 종교보다 오랜 역사를 지닌 나라가 있는가. 생명력에서 국가는 종교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무상한 지상 권력은 하늘의 영원한 권력이 지배하고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종교는 시대의 구원자를 자임하며 부패한 정치를 대신하고자 그 공세를 늦추지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 대부분이 채택한 정교분리나 국교불인정은 국가권력의 장에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선언적 의미가 크다. 한국은 국가의 기원인 단군신화를 비롯해 유구한 불교 문화재, 유교적 생활방식, 편의점보다 많은 교회, 신종교, 예언자적 능력을 발휘하는 점집 등을 보건대 종교성이 흘러넘치는 사회다. 정부가 종교단체의 세금을 면제하거나 산하의 복지·교육기관에 보조하는 일은 엄격한 차원에서 정교분리일까. 설법·설교를 하는 종교전문인들이든 그것을 듣는 신자들이든 투표장으로 가기는 마찬가지다. 종교인의 정치참여는 기본권에 속한다. 가정이지만, 향후 종교교단이 연대해 정당을 만들고 신정연합국가를 세운다고 할 때, 과연 이를 막을 수 있을까.
종교는 과거에 누렸던 절대적 권능의 달콤함을 알기에 자신의 자리를 꿰찬 국가에 대해 권토중래를 노리고 있다. 국가는 정치의 장에서 종교를 배제하면서 스스로 신적 권위를 갖게 되었다. 교단, 지도자, 경전, 율법, 신자에 해당하는 체제도 갖추고 있다. 정부기관, 정치지도자, 헌법과 법률, 사법기능, 국가에 종속된 국민, 그리고 무소불위의 능력은 대외전쟁 선포를 통해 국민을 사지에 몰아넣을 수 있다. 무지했던 시대에 종교도 그랬지만, 이제는 합법적으로 국민을 국가 존속의 도구로 삼을 수 있다. 국가와 종교의 동업관계 중 극적인 모순을 보이는 것은 군종이다. 적대적 국가에 각각 같은 교단의 군종이 있을 때, 유사시에 그들은 자신의 형제를 죽이는 일에 가담하게 된다.
이러한 모순들이 하루아침에 해소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둠은 불을 밝히면 사라진다. 종교의 순기능을 배양하고 역기능을 비판하는 일이다. 교육현장에서 이뤄지는 종교교육에 대해서는 일부 논란이 있지만 시민교육의 차원에서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다원주의에 입각, 종교의 덕목 및 가치와 병행해 종교의 이중성과 폭력성마저 토론함으로써 이 사회의 지속성에 어떻게 도움이 될 것인지를 논의하는 것이다. 국가끼리 저지른 1·2차 세계대전의 참화는 근대국가의 몰종교성에서 배태된 것은 아닐까. 과학과 자본에 포획된 신이 된 인간의 한계는 아닌가. 이제는 문명의 위기를 초래한 인간의 오류를 교정할 자기성찰마저 놓아버린 것은 아닐까. 교단주의에 사로잡힌 종교 또한 전쟁터에 자신의 신도들을 내몰거나 약자의 고통을 외면해 윤리적 파탄에 이르렀던 암흑의 역사가 있지 않은가.
사회에 예속된 모든 것은 나의 외피에 불과하다. 국민이든 종교인이든 환경과 문화에 의해 주어졌거나 자발적으로 선택한 결과다. 내 모습은 여러 이름으로 조건 지어진 인격체들의 종합이다. 겹겹의 조건들을 벗기면 무엇이 남는가. 순수하고도 자유로운 존재다. 그 존재가 우주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아는 것, 그것이 종교다. 전체와 떨어져 분열될 때, 지금 세상이 그렇듯 자아는 고립되고 고통의 시작인 이기주의와 약육강식이 판친다. 본질을 벗어난 종교는 정치와 야합해 세속마저 지배하고자 한다. 타자에겐 적대적인 인간성을 털어내고 세계와 소통하는 자기만의 참된 종교성을 회복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종교인의 정치참여가 아닐까. 민주주의의 축제 속에서 벌어지는 최고의 정치적 예술인 통합이 바로 종교의 길이기도 한 이유다.
원익선 교무 원광대 평화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