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기후에너지환경부가 주도한 원전 관련 여론조사가 잇따라 보도되면서, 마치 국민 다수가 원전 확대에 동의하는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시민의 숙고된 판단을 반영한 것인지 여부는 차치하고 원전 정책은 여론조사 숫자로 밀어붙일 사안이 아니다. 정부가 책임 있게 설명하고 설득해야 할 문제이다.
이번 조사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질문의 구조와 전제가 이미 기울어져 있다는 점이다. ‘에너지믹스’를 사실상 전제로 깔고 원전 필요성을 묻는 방식은 중립적 질문이 아니라 특정 방향의 동의를 유도하는 설계에 가깝다. 원전은 단순한 선호 문제가 아니라 위험과 비용, 장기적 책임, 지역 부담을 함께 묻는 사회적 선택이다. 그럼에도 설문에는 핵폐기물 처리, 사고 위험, 입지 갈등, 대안 시나리오 같은 핵심 쟁점이 충분히 제시되지 않았다. 이런 여론조사는 공론화의 출발점이 아니라, 결론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오해받기 쉽다.
조사 결과의 불투명성 역시 문제다. 공개 자료에는 지역별 응답 분포, 특히 원전 인접 지역의 찬반 비율이 제시되지 않았다. 입지 문제를 배제한 채 ‘원전이 필요하냐’고 묻는 것 자체가 현실을 왜곡한다. ‘수도권에 신규 원전을 건설하는 데 찬성하는가’ ‘내가 사는 지역 인근에 원전이 들어오는 것에 찬성하는가’를 물었다면 결과는 어땠을까. 원전 논의의 본질적 갈등은 언제나 ‘필요하냐’가 아니라 ‘누가 감당하느냐’였다. 실제로 부산 지역 시민단체들은 고리 2호기 수명연장에 반대하며 지금 행정소송 절차를 밟고 있다. 그럼에도 전국 평균 수치만 강조하는 것은 원전 정책에서 가장 큰 위험과 부담을 감당하는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가 통계 속에 묻히게 만든다.
정부가 반복하는 ‘AI 시대 전력 수요 폭증’ 논리도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AI는 전력 다소비 기술이라지만, 동시에 에너지 효율화 기술이기도 하다. 세계적으로 AI는 전력 수요 관리, 건물·산업 에너지 최적화, 스마트그리드 운영 등 에너지 절약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그럼에도 정부 설명에는 수요 관리나 효율 혁신은 보이지 않고, 공급 확대 논리만 반복되고 있다.
더 우려스러운 점은 이번 여론조사가 정부가 져야 할 정책 책임의 회피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는 ‘국민 다수의 찬성’을 강조하지만, 원전 확대의 위험과 비용, 장기적 책임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세계는 원전 정책에서 더욱 신중한 접근을 요구하고 있음에도 우리나라는 다시 ‘필요성’이라는 이름 아래 속도전 방식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 아닌지 묻게 된다.
원전 정책은 단기 여론으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특히 지역의 삶과 직결되는 문제이기에 더 그렇다.
윤석열 정부의 ‘원전 폭주정책’인 노후 원전 수명연장과 신규 원전 건설 추진은 사실상 ‘환경내란’의 연속과 다를 바 없다. 이재명 주권정부에서 이런 식으로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여론조사의 숫자가 아니라, 정부의 책임 인식을 명확히 하고 지역 주민의 목소리를 존중하는 태도다. 그 책임의 출발점은 지역을 존중하는 ‘제대로 민주주의’에서 시작돼야 한다.
김해창 경성대 환경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