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밤 평상에 누우면 은하수가 보였다. 반짝이는 별들 사이로 흐르는 신비한 안개. 집은 가난했지만 내 유년이 가난하지 않았던 것은 이런 보물들 덕분이다. 그런데 언젠가 한 친구가 내 보물이 진품이 아닐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했다. 맨눈으로 은하수를 보는 것은 쉽지 않다며, 아마도 사진으로 본 은하수를 어린 시절 본 것과 뒤섞었을 거라고 했다. 그 자리에서는 ‘서울 출신이 뭘 알아’라고 대꾸했지만, 오랫동안 은하수를 보지 못했던 나는 그의 말에 흔들렸다. 그러다 그해 가을, 생애 다시 보기 힘든 유성우가 내린다는 소식을 듣고는 안면도까지 갔다. 불빛 없는 모래사장에 드러누워 하늘을 보았을 때 너무 기뻐 고함을 쳤다. “저기 있잖아!” 은하수였다.
사회학자 조형근의 글은 내게 이날의 은하수를 떠올리게 한다. 3년 전쯤 <나는 글을 쓸 때만 정의롭다>를 읽었을 때 그랬고, 이번에 나온 <앎과 삶 사이에서>를 읽고서 더욱 그렇다. 뜬금없는 이야기지만, 대학 시절 나는 선배들을 진심으로 존경했다. 어린 나이인데도 어떻게 그런 고민, 그런 말, 그런 실천을 하는지 믿기지가 않았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들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고, 또 언제부턴가는 시치미를 떼듯 다른 말을 하기 시작했다. 과연 내가 은하수를 보았던가. 그런데 조형근의 책을 읽고 ‘나도 은하수를 보았어’라고 말해주는 선배를 느낀다.
학자 조형근의 글에 기억 떠올라
앎과 삶 사이는 부끄러운 자리
어중간함도 일종의 정직 깨달아
나는 다시 은하수를 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도 대학생이던 1988년에 드러누워 하늘을 보았다고 했다. 서울 사당동 산동네에서 철거민들과 농성하고 있을 때 ‘백골단’이 밀어닥쳤다고 한다. 너무 무서워 한참을 도망치다 바닥에 드러누웠는데 그때 하늘이 유난히 참 푸르렀다고 했다. 그는 돌아가지 않고 집으로 갔다고 한다. 거기서 일어난 끔찍한 일에 대해 전해들었지만 “다시는 거기에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글들을 읽어보면 그가 어디로 이사를 가든 옆 동네가 그날의 철거촌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삿짐을 쌀 때마다 자신이 도망쳤던 마을까지 싸맸던 것이다. 언제나 그의 옆 동네에는 산재노동자가 살고, 기초생활수급자가 살고, 저녁밥을 챙겨먹지 못한 아이가 살고, 가난한 이주노동자들이 산다. 그는 그곳에 관한 소식을 매일 듣는다. 귀를 거기 대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가 그의 윤리적 거점이다.
마당이 있는 작은 집과 마음까지 넉넉한 이웃이 있고 주식 투자해서 돈을 번 사람들의 소식도 들리는 세계에 살고 있지만 그는 ‘이편’에 살고 있는 자신을 무서워한다. 그리고 ‘저편’에 사는 그날의 사람들이 “왜 돌아오지 않았느냐”고 물을 날을 두려워하면서도 기다린다. 그 기다림 속에서 그는 당장에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작은 것이라도 해볼 일이 없을까를 고민한다. 그것이 그의 윤리이고 민주주의다. “윤리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그것 없이는 세상을 바꾼다는 꿈조차 꿀 수 없다.” 그때는 그래서 별들 사이를 흐르는 신비한 안개를 볼 수 있었던 모양이다.
<앎과 삶 사이에서>의 첫 문장을 그는 이렇게 적었다. “어중간하게 살아왔다.” 내 이야기였다. “시인이 노래할 만큼 아픈 사랑”도 못했고, “세상이 아파할 만한 고통의 서사도 없”다. “아침에는 좀 더 나은 날이기를 바라며 일어나지만, 잠자리에 들 때면 나도 세상도 바뀌지 않은 채로 그대로다. 언제부턴가는 아침의 결심하기도 잊은 채 나이만 먹고 있다. 이 삶에 나아지는 게 있을까? 이 책은 조금씩 나아지기를 기대하면서 보낸 어중간한 날들의 기록이다.”
이 책을 읽고서야 어중간함도 일종의 정직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어중간하고 어정쩡한 것은 잊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잊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삶의 양태이다. 멀리 도망치지 못하는 마음, 부인하지도 외면하지도 못하는 마음, 누군가의 불안과 고통 속에서 내 안전과 편안이 부끄럽고, 사회적 불의에 내가 가담한 몫이 있음을 아는 마음이 이런 태도를 만들어낸다. 대학교수를 때려치우고 동네로 돌아온 이 사회학자는 어중간함 속에서, 그래도 사람들과 작은 한 걸음이라도 내딛고, 희망이 비칠 사소한 틈새라도 찾으려 애쓰고 있다.
나 역시 어중간하게 살아온 한 사람으로서 그에게 감사를 전한다. 앎과 삶. 언제부턴가 이 두 글자가 나란히 놓여 있으면 나는 올가미에 걸려든 동물처럼 괴로웠다. 오래전 나는 “좋은 앎과 좋은 삶을 일치시키는 연구자들의 자유로운 생활공동체”에 산다고 떠벌렸는데 더 이상 그렇게 살지도 않고 그런 게 존재했다고 믿지도 않는 사람이 된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왜 괴로웠던 걸까. 오늘, 다시 알게 되었다. 나는 은하수를 보았던 것이다. 그것은 올가미가 아니라 은하수였다.
고병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