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8개 이상의 전쟁을 중단시켰는데도 귀국이 나에게 노벨 평화상을 주지 않기로 했다는 점에서, 나는 평화만을 생각해야 한다는 의무를 더는 느끼지 않는다.” 그린란드에 대한 미국의 전면적인 통제권을 주장하며, 미국 대통령이 노르웨이 총리에게 보낸 서한의 일부다. 노벨상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평화를 도외시한다니, 우스꽝스럽지만 웃어넘길 수만은 없다. 무시당했다는 감정은 오늘날 폭력을 이해하는 열쇠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검색창에 “무시했다는 이유로”라는 문구만 입력해도 온갖 강력범죄 사건들을 마주하게 된다.
도덕적 의무가 타인들의 인정에 기반하고 있다는 이 스스럼없는 발언을 접하며,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를 떠올렸다. 주인공 패트릭 베이트먼 역시 이런 세계에 살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뉴욕 금융가의 젊고 유능한 임원처럼 보이지만, 실은 동료들과의 기괴한 명함경쟁에서 줄곧 열패감에 시달리는 왜소한 자아를 지니고 있다. 거의 구별되지 않는 하얀색 명함들을 주고받으며, 그와 동료들은 미묘한 글꼴의 차이, 종이의 질감, 하얀색의 미묘한 색조 차이를 따지며 비교의 수렁에 빠져든다. 패트릭은 이 사소한 경쟁에서 자신의 초라함을 확인할 때마다, 살인을 저지른다.
명함경쟁은, 타인의 인정을 갈구하면서도 정작 서로를 구별할 수 있는 표식이 거의 사라진 사회의 딜레마를 암시한다. 비슷한 명함을 사용하는 데다, 같은 브랜드의 정장을 입고, 같은 브랜드의 안경을 쓴 채 살아가는 세계에서 동료들은 종종 패트릭을 다른 이로 착각한다. 이런 사회에서 자신을 또렷이 드러내고 인상을 각인할 수 있는 최대의 승부처는 ‘도르시아’라는 식당의 예약 가능 여부다. 돈이 많다거나, 줄을 먼저 선다거나 하는 식으로는 예약에 성공할 수 없다. 성패를 가르는 것은 사회적 평판의 총합이다. 그들 사이의 노벨상이다. 번번이 예약에 실패하는 패트릭은 언제든 ‘도르시아’에 예약할 수 있다고 거들먹거리는 동료를 질투하다, 끝내 살해하기에 이른다.
이 사건은 영화의 서사를 이끄는 핵심 동력이지만, 패트릭의 폭력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과 아무 접점도 없는 이들을 빈번히 살해한다. 엘리트 동료들에게 과잉 집착하면서도, 자신과 공통점을 지니지 않는 노숙인, 매춘부, 낯선 여성에게는 놀랄 만큼 무감각한 모습을 보인다. 그들은 단지 자아 회복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패트릭은 자기 자신의 위대한 자아와 부박한 현실 사이의 간극을 폭력으로 좁히려 하면서, 그 과정에서 시민적 공통점을 찾는 데에 실패하는 인물이다. 남다른 정체성에 대한 강박은 획일화된 물질사회에 대한 반작용인 동시에, 타인과의 공통점을 찾아내는 능력을 상실한 사회의 병리적 징후다. ‘사이코’는 사회 속에서 오직 자신의 정체성만을 발견하는 사람들 틈에서 탄생한다.
차이에 대한 집착은 끝내 서로의 시민적 정체성 자체를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현실의 ‘아메리칸 사이코’들은 누가 진짜 미국인인가에 병적으로 집착하고 있다. 위대한 미국인의 정체성이 부정당해왔다고 느낄지 모른다. 바로 이 무시당했다는 감정이, 피부색이 다르고, 영어가 유창하지 않으며, 출신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만으로도 누군가의 시민권을 언제든 의심할 수 있는 정치를 작동시킨다.
공통의 피부색과 전통을 공유하는 한국인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으면서도 서로를 끊임없이 질시한다면, ‘코리안 사이코’ 역시 낯선 조어만은 아니다. 정치적 폭력은, 스스로 위대하다고 믿는 자아를 정치지도자에게 투사하고, 동류를 질투의 대상으로 삼으며, 낯선 이들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할 때 발생한다. 끝없이 자기만의 고유성을 탐색하고 증명하는 세태 속에서, 우리는 시민으로서의 공통점에 다시 주목할 수 있을까? 그것이야말로 이 혼란한 시대에 ‘사이코’가 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조무원 정치학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