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평택항에 철강 제품들이 쌓여있다. 2025.07.31 권도현 기자
지난해 제조업의 기초 체력과 성장 능력을 보여주는 ‘생산능력지수’가 업종별로 극명한 온도 차를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인공지능(AI) 열풍을 탄 반도체 업종은 설비를 확장해가며 생산능력지수가 사상 최고치를 경신한 반면, 자동차와 철강 등 전통 주력 산업의 지수는 제자리걸음을 하거나 감소세를 보였다. 한국 경제에서 제조업의 양극화가 심화하고 있다.
경향신문이 국가데이터처의 국가통계포털을 8일 분석한 결과, 지난해 반도체 제조업 생산능력지수(2020=100)는 전년 대비 12.2% 늘어난 174.3을 기록했다. ‘산업생산지수’가 현재 성적표라면, 생산능력지수는 설비와 인력을 모두 가동했을 때 생산할 수 있는 최대 규모를 뜻하는 ‘성장 그릇’과 같다. 당장 매출이 늘지 않더라도 산업생산지수의 상승은 기업들이 미래 수요를 기대하며 설비를 확대하고 있다는 ‘신호’로 해석된다.
반도체 생산능력은 2020년부터 2022년까지 3년 연속 두 자릿수 성장률을 기록하며 가파르게 성장해왔다. 2023년과 2024년에 한 자릿수 성장을 했지만, 지난해 AI 시장 확대에 따른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차세대 반도체 수요가 폭발하며 다시 큰 폭으로 증가했다.
공장의 활력을 나타내는 가동률지수 역시 반도체는 103.0으로 전년 대비 1.9% 상승했다. 일반적으로 생산능력과 가동률이 동반 상승하는 것은 해당 산업의 호황을 뜻하며, 향후 설비투자가 더욱 확대될 것임을 예고하는 신호로 풀이된다.
반면, 또 다른 주력산업인 자동차는 주춤한 모습이다. 지난해 자동차 및 트레일러 제조업의 생산능력지수는 109.0으로 전년보다 0.8% 감소했다.
자동차, 조선, 건설 등 전방 산업의 필수 소재를 공급하는 1차 금속 제조업의 생산능력지수는 99.2에 그쳐 2020년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다. 전년 동기와 비교해선 간신히 제자리를 지켰지만, 철강과 비철금속 제조업 모두 생산능력 확충 없이 장기간 제자리걸음을 이어가며 실질적 성장이 멈춘 상황이다.
화학 업종 부진은 더욱 두드러졌다. 화학 물질 및 화학제품 제조업의 생산능력지수는 98.2로 전년 대비 0.5% 감소했다. 특히 공장 가동률지수는 85.9에 그쳐 생산 설비를 보유했음에도 실제 생산은 저조한 모습을 보였다.
자동차· 화학 업종 등의 부진은 중국 저가 밀어내기 공세로 인한 수익성 악화와 트럼프 행정부의 고관세 장벽이라는 대외 불확실성이 맞물린 결과로 풀이된다. 이에 따라 국내 기업들이 신규 설비투자를 주저하면서 생산능력지수의 정체와 하락이 나타나고 있다.
정부는 이에 석유화학 업종의 경우 사업 재편을 돕기 위해 자산 매각 시 법인세 과세이연 기간을 연장해주고, 철강 분야의 신성장·원천기술 세액공제 대상을 확대하는 등의 대책을 내놨지만 실제 성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전문가들은 산업구조가 반도체 업종에만 쏠리는 현상이 경제 전반에도 좋지 않다고 우려했다. 반도체는 자본 집약적 산업인 만큼 생산능력이 늘어도 고용 유발 효과가 철강이나 자동차보다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이다. 고용 파급 효과가 큰 자동차와 소재 산업의 위축은 가계 소득 둔화와 내수 침체로 이어질 수 있다.
이항구 한국자동차연구원 연구위원은 “미국의 보호무역주의 기조와 중국의 저가 공세가 맞물리면서 국내 기업들이 현지 생산을 늘리는 경향이 더욱 뚜렷해질 것”이라며 “이는 국내 제조업 침체 현상과 함께 고용 시장 둔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