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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밍아웃’은 사절합니다

입력 2026.02.08 19:56

수정 2026.02.08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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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운 사람만큼 자기 언어가 절실한 사람도 없다. 암을 둘러싼 여러 표현은, 결국 자신의 어려움을 잘 설명하려고 고안된 도구다. ‘암 환자’ 대신 ‘아만자’라고 쓰면서 자신의 질병을 둥글려서 받아들인다. 지금은 거의 쓰지 않는 표현이긴 하지만 “스트레스 받는다”고 말하는 대신 “암 걸리겠다”고 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럼 이런 말은 어떨까. “제 친구 중에도 도미처럼 ‘암밍아웃’을 한 사람이 있어요.”

성소수자의 ‘커밍아웃’에서 따온 이 표현이 커밍아웃의 본래 의미와 맥락을 지워버린다는 비판은 꾸준히 있었다. 타인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는 ‘임밍아웃’, ‘덕질’하는 사람임을 밝히는 ‘덕밍아웃’ 같은 신조어도 마찬가지다. 2020년 장혜영 당시 국회의원이 차별금지법 발의와 함께 ‘내가 이제 쓰지 않는 말들’ 해시태그 캠페인을 전개했을 때도 ‘○밍아웃’은 대표 사례로 등장했다. 그로부터 6년이 되어가도록 차별금지법은 제정되지 않았는데, 그동안 암 경험자가 된 나는 ‘암밍아웃’이라는 말을 수시로 마주하게 됐다.

‘암밍아웃’이 널리 쓰이는 이유를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진단을 받고 ‘사람들에게 어떻게 알려야 하지’라며 고민에 휩싸였던 순간을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회복기에 들어서도 사정은 비슷했다. 암 경험자임을 밝히고 나면 똑같은 염려(재발하는 거 아냐?)와 통제(건강 관리해야지!)를 피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괴로운 결단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데 커밍아웃은 적절하고 강력한 언어로 발견됐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탄생한 ‘암밍아웃’은 ‘암 경험자가 사회적 편견을 뚫고 당당하게 살아나가는 태도’라는 긍정적인 의미를 덧입었다. 콘텐츠 생산자들은 “암밍아웃을 하면 주변으로부터 지지받을 수 있는 것이 장점”이라며 ‘암밍아웃’을 독려하기도 한다. 나아가 암관리법에 근거해 설립된 암생존자통합지지센터의 존재는 암 경험자의 사회적 삶을 정책적으로 보장해 나가겠다는 선언과 같다.

커밍아웃과 ‘암밍아웃’의 현실은 이 지점에서 갈린다. 환자에게 부여되는 성별 코드, 환자와 보호자의 관계, 병원에 동행해 의료진 면담을 하고 간병할 자격, 마지막을 함께하며 눈을 감을 권리 등등, 아픈 사람의 일상에는 정체를 밝히고 증명받아야 하는 순간이 허들처럼 놓여 있다. 얼마나 친밀하고 오랜 관계였든, 아픈 파트너의 보호자임을 인정받기 위해 매번 애써야 했던 사람들의 사례는 ‘암밍아웃’에 대한 사회적 지지와 안전망이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접근하기 힘든 특권임을 드러낸다.

물론 언어는 생물이고,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한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박경석 대표가 시위대를 향해 욕설하는 시민들에게 “좋습니다. 우리는 병신입니다. 병신이라도 당당한 병신이길 원합니다”라고 외쳤을 때, ‘병신’은 모욕의 언어에서 권리 선언의 언어로 전환되었다. 가부장의 공간이었던 ‘사랑방’은 오늘날 소통 공간을 이르는 단어로 변모했다. 결국 언어의 변용은 맥락에 따라 해방이 되기도, 탈취가 되기도 한다. 공감과 연대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 변용은 탈취에 가깝다. “암 걸릴 것 같다”는 말이 암 환자의 고통을 가벼이 여기는 태도라고 지적받으며 사라진 것을 떠올려보자. 커밍아웃이 민생 문제로 여겨지지 않는 사회에서 ‘암밍아웃’을 말한다는 건 아무래도 좀, 염치가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제22대 국회에서 발의된 차별금지법이 이번에는 꼭 제정되기를 바란다. 성소수자이건, 아픈 사람이건, 나이가 많건 적건, 어느 나라에서 왔건 간에 저마다의 고유한 삶이 평등하게 존중받기를 바란다. 그러다보면 지금은 비밀 고백에 이리저리 불려 다니기만 하는 ‘커밍아웃’이 자긍심과 더불어 연대와 쟁취의 역사를 품게도 되지 않을까. 그런 날이 온다면 나도 ‘암밍아웃’이라는 말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자리를 바꾸어가며 더 풍요롭게 확장되는 언어의 생명력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김도미 <사랑과 통제와 맥주 한잔의 자유> 저자

김도미 <사랑과 통제와 맥주 한잔의 자유>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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