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은 제법 쌀쌀합니다. 이런 날은 따뜻한 수프가 제격일 것 같아 달콤한 단호박 수프, 잘 구운 빵, 그리고 계란프라이를 준비하려 합니다. 먼저 수프를 끓일 냄비를 찾기 위해 주방 선반을 열자 안쪽 깊숙한 곳에 반짝반짝 빛나는 냄비 하나가 눈에 띕니다. ‘그래 수프는 법랑냄비에 끓여야지!’
법랑이란 금속 표면에 유리질 유약을 바르고 900도 정도로 구워서 만든 제품을 말합니다. 이 유약은 유리의 주성분이기도 한 이산화규소 등을 물에 풀어 현탁액으로 만들고, 여기에 이산화규소의 용융점을 낮추어 균질하게 유리질 피막이 형성되도록 도움을 주는 소량의 금속 원소들을 첨가한 것입니다.
참고로 이러한 기술은 기원전 2000년경 고대 이집트에서 처음 등장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이를 호로(琺瑯)라 불렀는데, 우리가 그 한자를 차용하면서 법랑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법랑을 만드는 이유는 두 재료가 갖는 장점을 결합하기 위함입니다. 우선 금속은 원하는 모양으로 성형하기 쉽고 잘 깨지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물리적 긁힘이 발생하고 산이나 염도가 높을 경우 부식이 일어나기 쉬운 단점도 있습니다. 이에 반해 유리나 도자기와 같은 세라믹 소재는 반응성이 낮은 매끈한 표면으로 인해 오염에 강하고 부식에도 높은 저항성을 보입니다. 이와 더불어 고온의 열을 견디는 내열성 또한 우수하죠. 그러나 충격에는 약한 단점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잘 깨진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두 재료를 결합하면 잘 깨지지 않으면서도 부식의 염려가 없는 이상적인 조리도구가 탄생합니다. 게다가 도자기처럼 광택이 나는 매끈한 표면은 아름답기까지 하죠. 그런데 금속과 세라믹의 조화로 만들어지는 법랑의 장점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조리도구의 소재를 선정할 때 또 다른 고려사항은 열입니다. 열을 얼마나 잘 전달하는지, 그 열을 얼마나 잘 보존하는지 또한 중요한 것이죠. 조리도구로 금속이 가장 많이 사용되는 이유는 다른 소재들에 비해 열을 빠르게 전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금속은 열원이 차단되었을 때 쉽게 열을 잃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빨리 식는 것이죠. 만약 요리의 열을 오래 보존하고 싶다면 금속 이외의 다른 소재를 고민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해 비열이란 개념이 있습니다. 어떤 물질 1g의 온도를 1도 높이는 데 필요한 열량(cal)으로 정의되는데, 비열이 높을수록 가열은 어렵지만, 그만큼 열을 잘 보존하는 특성을 보입니다. 비열이 높은 대표적인 조리도구로 뚝배기가 있습니다. 강철의 비열은 0.1이지만 뚝배기는 그 4배에 달합니다. 그래서 뜨거워야 맛있는 찌개류는 보통 뚝배기를 사용합니다.
법랑에 사용되는 유리질 세라믹의 비열은 약 0.2입니다. 뚝배기보다는 낮지만 금속보다는 높은 편이죠. 그래서 법랑으로 만들면 금속냄비와 뚝배기의 중간 정도 성질을 보이면서 상대적으로 비열이 낮은 금속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습니다. 양 극단에 놓인 금속과 뚝배기 사이에서 어느 정도 절충점을 찾은 셈입니다. 이러한 법랑 기술은 현재 다양한 분야에서 응용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제트 엔진처럼 내열성이 요구되는 금속 부품을 코팅하는 데에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제 주방에서 쓰는 물건이라고 법랑을 하찮게만 봐서는 안 되겠습니다.
임두원 국립과천과학관 연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