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방에는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명절이면 어머니의 방에는 낮잠을 자거나 짐을 꾸린다며 마음 편히 들락거렸지만, 아버지 방에는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의 방은 아버지가 사는 방이기보다 아버지가 나오는 방이었다. 아버지의 방 안쪽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아버지에 대해서 더 알게 되는 게 어쩐지 달갑지 않았다. 아버지를 미워했느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다. 나는 가족들 중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았고, 내성적이어서 말수가 없는 아버지가 편했다.
작년 겨울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이제 비로소 아버지가 궁금해져서가 아니라, 방을 정리하기 위해서 처음으로 아버지 방에 들어갔다. 좀처럼 집안일을 거드시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방이 꽤나 지저분할 거라고 상상했는데, 아버지의 방을 보고 나면 얼마간 우울해질 거라는 각오가 무색할 정도로 깨끗하고 말끔했다.
가장 놀란 것은 옷장이었다. 옷이 너무 많았다. 아버지는 좀 별난 구석이 있었다. 쇼핑을 즐기셨고, 브랜드를 좋아했고, 화려한 디자인과 색깔로 자신을 치장했다. 방에서 나올 때면 다른 아버지들은 입지 않는 화사한 색깔의 새 옷을 입고 나타났다. 아버지는 가족들 중 가장 튀었다.
옷장 속에는 그 취향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빨간 바지, 주황 바지, 흰색 바지만 각각 열 벌이 넘었다. 코트와 점퍼는 스무 벌이 넘었고, 아직 포장을 뜯지 않은 양말은 30켤레였다. 만약 방의 주인이 누구인지 몰랐다면, 쇼핑중독에 걸린 청년세대의 방이었다고 해도 과하지 않을 정도였다. 언니는 아버지가 매일 같은 색깔의 옷만 입어서 똑같은 옷인 줄 알았는데 그게 다 다른 옷인 줄을 이제야 알았다며 혀를 내둘렀다.
입지 못한 옷, 멈추지 못한 욕망
장롱을 가득 채운 헌 옷이 내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유산이었다. 그 옷은 우리 세대가 미래세대에 물려준, 어마어마하게 처치 곤란한 지구의 상태랑 어딘가 비슷한 데가 있었다. 무겁고, 불편하고, 너무 화려했으며, 무엇보다 다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지나치게 많았다.
아버지에게는 그 옷이 어땠을까를 생각하자 갑자기 쓸쓸해졌다. 아버지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불필요하고, 미련하게 거추장스럽고, 건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버지는 왜 다 입지도 못할 만큼 많은 외출복을 사야 했을까? 이상했다. 아버지는 집 밖에 나가는 걸 별로 안 좋아했으니까. 내성적인 아버지는 집 밖으로 나가시는 일이 좀처럼 없었으니까.
고양시의 한 도서관에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고 독서토론을 진행했다. 책도 유행을 타는, 책도 쌓아놓고 절찬리에 판매하는, 책도 할인하고 책을 사도 덤을 받는, 무서울 정도로 모든 게 상업 논리에 휘말려버린 시대에 <난쏘공>은 여전히 유효하고 필요한 소설이었다. 앞면과 뒷면이 같은 뫼비우스의 띠, 안과 밖을 구분할 수 없는 클라인의 병은 구분짓고 차별함으로써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혐오의 시대에 여전히 유효한 이야기였다.
소설에는 우리 모두가 난장이라고 쓰여 있었지만, 모임에 참석한 시민분들 중 자신을 난장이에 감정을 이입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이제 다 사장님들이었으니까. 참가자인 70대 남성은 유튜브 광고에서 투자를 권할 때마다 솔깃하다고 고백했고, 60대 여성은 이웃이 아파트 투기로 번 돈으로 크루즈 여행을 떠나서 배가 아프다고 털어놨다. 사치스러운 관광으로 얻는 값비싼 힐링보다 책을 읽고 다정하게 이야기 나누는 도서관의 교실 안이 더 행복하지 않겠냐고 물었더니, 아니라고, 그게 그렇지가 않다며 고개를 휘휘 저으신다. 갈 수 없어 못 갈 뿐 크루즈 여행이 더 탐나고 부러우시단다.
아버지에게 왜 그렇게 많은 외출복이 필요했을까? 나는 주로 집에서 생활하셨던 아버지가 정작 실내복은 사지 않으셨다는 걸 깨달았다. 아버지는 자신에게 필요하지 않은 것을 사서 쌓아두는 데 인생의 상당 시간을 소비했다. 그리고 나는 그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아버지의 유산은 ‘노 바잉’이었다
화려한 외출복으로 가득 채워진 아버지의 방이 내게 묻는다. 네 아버지의 삶은 네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쓸쓸한 것이 아니었겠느냐고. 칠십이 되어서도 네 아버지는 자유롭지 못했다고. 미디어가 현혹한 가짜 욕망을 좇아 쇼핑하는 삶, 그게 아버지의 삶이었다고. 광고와 할인이라는 유혹을 물리치지 못했던 내 아버지를 대신해, 아버지가 샀지만 미처 다 입을 수 없었던 수십 벌의 옷들이 내게 말한다. 이제 너는 충분히 가졌다고, 쇼핑을 그만 멈추라고, 아버지를 반복하는 대신 아버지를 넘어서라고.
그렇게 지금 나에게 노 바잉(no buying: 지구의 환경을 회복하기 위해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거나 중단하는 실천)이 왔다. 내 아버지의 유산이 왔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