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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아래서

입력 2026.02.09 20:17

수정 2026.02.09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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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수레를 피할 수 없다.’ 이재명 대통령이 로봇 도입을 반대하는 노조를 향해 한 말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이미 수레바퀴 아래에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고객센터는 목소리만으로 본인인증을 하는 인공지능(AI) 시스템을 공공기관 최초로 도입했다. AI는 노동자뿐만 아니라 이용자에게도 낯선 존재다. 이용자에게 목소리인증을 설득하고 등록하는 부담은 오롯이 상담노동자에게 전가된다.

건강보험은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상담 건수가 많을 뿐만 아니라 상담 내용도 자격관리, 보험료 부과징수, 요양급여, 건강검진, 제 증명 발급 등 복잡하고 어렵다. 건보 고객센터 노동자들이 하루에 처리하는 상담 건수는 평균 78건이다. 순수 상담 시간만 5분1초, 후속 조치는 2분2초가 걸리는 고강도·고숙련 노동이다. 여기에 15분 이상 걸리는 AI 목소리인증이 추가됐다.

정보를 바로 얻고 싶은 국민은 콜센터에서 활용하는 AI 상담을 인간을 만나기 위한 시험처럼 느낀다. 무릇 시험은 분노와 짜증을 부른다. 사회공공연구원이 고객센터 노동자 169명에게 AI 때문에 짜증을 낸 고객을 만난 경험을 물었더니 78%가 있다고 대답했고, 그중 20.7%는 매우 자주 겪는다고 답했다. AI 전환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노동자가 감당하고 있지만, 이를 개선할 권한은 없다. 고객센터 노동자들은 건강보험공단 소속이 아니라 하청 소속이기 때문이다.

기술을 개발할 수 있는 예산과 역량은 공공기관인 건강보험공단에 있지만 정작 AI를 현장에서 활용하는 것은 하청노동자들이다. 여기서 거대한 단절이 발생한다. 노동자들은 국민에게 새로운 AI 시스템을 안내해야 할 뿐만 아니라, 화가 나 있는 국민의 감정을 달래면서 AI보다 나은 상담을 제공해야 한다. 제대로 된 AI 전환을 위해서 숙련된 노동자가 필요한 것이다. 노동자에게 양질의 직무교육을 제공하고, AI를 활용하면서 발생한 문제에 대해 개발부서에 의견을 개진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인력관리와 상담 건수에만 열을 올리는 하청업체가 이를 담보할 수는 없다. 실제로 절반 이상의 노동자들이 하청업체의 콜 압박 때문에 충분한 설명 없이 통화를 끊는다고 답했다.

공공기관이 AI를 도입하는 목표는 모든 국민에게 차별 없이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있다. 국민은 건강보험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원청과 하청으로 구분해 듣지 않는다. 정부와 건강보험공단도 이 문제를 인식해 6년 전 고객센터 노동자의 소속을 공단으로 전환하기로 했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AI는 하루아침에 노동자를 대체하지 않는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감당하는 노동자 위에서 새로운 수레바퀴가 굴러간다. 헤르만 헤세는 <수레바퀴 아래서>에서 “아무튼 지치지 않도록 해야 하네. 그렇지 않으면 수레바퀴 아래 깔리게 될지도 모르니까”라고 말했다. 노동자들은 수레바퀴를 막지 못하지만 그 아래서 깔려 죽지도 않는다. 건보 고객센터 노동자들이 정부가 6년 전 했던 소속기관 전환 약속을 지키라며 청와대 앞에서 풍찬노숙 중이다. 국가는 AI를 만들기 위해 고객센터 노동자의 목소리를 가져갔다. 이젠 국가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고객센터 노동자의 목소리를 들어야 할 때다.

박정훈 민주노총 공공운수 노조 부위원장

박정훈 민주노총 공공운수 노조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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