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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수막 정치가 돌리는 악마의 맷돌

입력 2026.02.09 20:20

수정 2026.02.09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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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국회의원이 가장 열심히 하는 일은 중앙정부에서 무슨 사업으로 얼마를 받아왔다는 현수막을 다는 일이다. 때로는 군청이 받은 사업까지 마구 넣어서 눈총을 받지만, 현수막의 효과인지 2012년부터 지금까지 계속 의원생활을 하고 있다. 현수막만 보면 매년 수백억원 이상의 사업들이 진행되는데, 왜 가게는 문을 닫고 사람들은 지역을 떠날까?

권한과 예산이 마법 지팡이일까

중앙정부가 지자체에 권한과 예산을 넘겨주면 비수도권이 살아날까? 지금 초광역권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2006년에 최초의 특별자치도가 된 제주도의 지난 20년을 잘 분석하면 좋겠다. 출범 당시 2조원대였던 제주도의 예산은 매년 늘어나 2025년에 7조5000억원 규모가 되었으니 3배 이상 재정이 늘어난 셈이다. 도지사의 권한도 강해졌다. 국제자유도시를 만든다는 명분으로 규제가 완화되고 기업에 대한 세금도 감면되고 특별개발우대사업과 제주투자진흥지구, 제주첨단과학기술단지, 공공기관 이전 등이 추진되었고 도지사가 이를 관할했다.

그 덕인지 제주도의 인구는 2006년 56만명에서 2023년에 70만명을 넘어섰다. 지역내총생산(GRDP) 규모도 2006년 약 7조원에서 2024년 약 27조원으로 늘어났다. 고용률도 2006년 60% 중반에서 2025년 70% 초반대로 올라갔고, 산업구조도 1차 산업과 영세 자영업에서 관광서비스업 중심으로 전환되었다.

겉모습만 보면 “실질적인 지방분권을 보장”해서 “도민의 복리증진과 국가발전에 이바지”한다는 특별법의 목적이 실현된 듯 보인다. 하지만 양적 팽창 이면에는 분명한 문제점들이 드러났다. 가장 큰 문제는 권한을 넘겨받은 제왕적 도지사를 민주적으로 견제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는 점이었다. 복잡한 이해관계를 가진, 거대 양당 중심의 지방의회가 그런 역할을 하기 어렵다는 점은 일찌감치 증명되었다. 최후의 보루라고 할 시민들의 견제도 2009년에 제주도지사 주민소환운동이 투표율 미달로 개표조차 못하면서 불가능해졌다. 영리병원, 제2공항, 휴양단지, 국제학교, 난개발 등이 계속 갈등을 일으킨 건 견제받지 않는 권력과 무관하지 않고, 이런 논란만큼 제주도 지방공무원들의 비위징계 비율도 높아졌다. 행정체계의 개혁이 동반되지 않아 기초자치제가 폐지되지 않았더라도 주민자치가 강화되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경제 규모는 커졌지만 삶의 질은 낮아졌다. 생태계 파괴로 농어업은 점점 더 어려워졌고, 관광서비스업 중심의 산업구조는 비정규직, 임시직만 늘려서 일자리의 질을 악화시켰다. 제주도의 비정규직 비율은 전국에서 가장 높은 편이고, 상용근로자의 평균 월급도 전국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또한 인구가 늘어나면서 내부의 불균등발전과 쓰레기 처리, 교통체증 같은 도시 문제들도 심각해졌고, 그러면서 제주도를 떠나는 인구가 차츰 늘어나고 있다. 앞으로 만들어질 초광역권은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까?

악마의 맷돌만 돌리지 마라

물론 제주도는 관광도시라는 특수성을 가지기에 다른 지자체에 무조건 적용하긴 어렵다. 그렇지만 특별자치도에 부여된 권한과 예산이 실제로 어떤 방향으로 활용되었고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검토할 좋은 사례는 될 수 있다. 그러면 문제는 가설이 아니고 해결해야 할 구체적인 과제가 된다.

지난 20년의 경로를 검토하는 것은 추상적인 논쟁보다 상황을 구체적으로 점검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방법일 수 있다. 우리가 하면 다르다는 식의 낡은 상투어 대신 실질적인 해법이 필요하다. 단체장과 관료들의 권한을 통제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과 제도, 늘어날 예산을 첨단산업과 개발만이 아니라 1차산업과 시민안전, 노동복지에 사용할 방법, 초광역권 내부의 불균등발전과 도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제도개혁 방안들이 제시되어야 논의가 한 단계 더 발전하지 않을까. 새로운 시도는 환영하지만 부작용을 알고 있음에도 고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슨 정치인가. 충분한 시간을 들여 대안을 찾으며 다른 경로를 찾을 수 있는 주제들이 지금은 너무 쉽게 소비되고 있다.

칼 폴라니는 블레이크의 시구를 인용해 자본주의가 사회와 규범을 파괴하고 인간의 삶을 갈아넣는 ‘악마의 맷돌’이라고 비판했다. 권한을 가져오고 예산만 따오면 문제가 알아서 해결될 것처럼 환상만을 부추기며 주민들을 찬반의 소용돌이로 밀어넣는 지금의 현수막 정치의 폐해도 그에 못지않다.

하승우 이후연구소 소장

하승우 이후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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