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별명은 ‘개구리’였다. 열 살 무렵으로 기억한다. 같은 반의 까불까불한 남자아이가 내 입이 돌출되어 있다며 그런 별명을 붙였다. 두꺼비는 커다란 데 비해 넌 몸은 조그맣고 눈만 크니 개구리랬다. “야, 개구리!”라며 마주치기만 하면 놀려대는 것이었다. 그 무렵부터 밤마다 얼굴을 베개에 콕 처박고 잠을 청했다. 입이 눌려 납작해지지 않을까 하는 유아적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렇게 엎드려 잔 결과 입은 그대로 남고 대신 이마만 납작해졌다. 아울러 웃을 때 저도 모르게 손등으로 입을 가리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이번에도 역시 입은 그대로 남고 앙상한 손등만 도드라졌다.
바로 그 앙상함으로 인해 학부 시절 ‘닭발’이란 별명으로 불렸다. 이십대에 갓 진입할 무렵 몸무게는 생애 최저점을 기록했고, 특히 손과 발은 마치 뼈에 창호지를 얇게 입힌 듯했다. 그게 부끄러워 한여름에도 샌들을 신지 않았고, 성당 앞줄에 앉게 되면 미사 중 기도할 때는 두 손을 모아쥐지 않았다.
감자탕과 닭발 등속을 파는 시장통 주점에서 동기들과 술 마시던 밤이었다. 안주를 추가 주문하려고 주방을 향해 손을 들자 옆자리의 친구가 “이렇게 보니 얘 손이 닭발이네” 했다. 그러더니 내 손을 붙잡아 화로 가까이 끌어당기며 “내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장난치는 것이었다. 실은 그해 봄 엠티 가서 둥글게 둘러앉았을 때 장국영을 닮은 선배가 “소영이는 발도 손처럼 조그맣네” 웃길래 귀밑까지 빨갛게 달아올라 담요 속으로 발을 쏙 감춘 일이 있었다. 하지만 ‘구지가’를 패러디했던 동기 녀석은 장국영이 아니라 너구리를 닮았으므로 이번엔 탁자 아래로 손을 수줍게 감추는 대신 내가 왜 닭발이냐며 세차게 항의했다. 그랬음에도 다음날부터 난 닭발이 되었다. 가까운 동기들이 만들어준 최초의 e메일 계정 또한 dakbarl@freechal.com이었다.
대학원 다닐 무렵엔 ‘백구’로 통했다. 방한한 독일 교수님께 추억으로 간직할 만한 문화적 경험을 만들어드리고자 강의 마친 후 다 같이 학교 후문 노래방으로 향했던 게 발단이었다. 후배의 삼단 고음 열창과 선배들의 ‘말 달리자’ 합창이 이어지며 흥이 달아오르던 중, 나의 예약곡이 모니터에 떴다. 연주 시간이 7분에 달하는 노래 ‘백구’였다. 꼬마와 아빠가 백구를 학교 앞 동물병원으로 데려갈 때까진 저마다 동심으로 돌아가 미소 띠었으나, 뛰쳐나간 백구를 찾고자 운동장을 헤매는 장면부터 서서히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말 달리며 띄워둔 열기는 휘발되고 없었다. 후반부에 이르러 백구가 그만 커다란 차에 치이자 한국어를 못 알아들으시는 독일 교수님을 제외한 전원이 탬버린 쥔 손을 내린 채 침통히 고개를 떨궜다. 그 일화로 인해 백구 이소영 선생으로 등극했다.
사범대학에서 일하고부터는 ‘법교수님’이란 별칭으로 불린다. 싫지 않았다. 전국 대학교원 가운데 김 교수 아닌 이들의 절반 이상이 이 교수일 테지만, 저 별칭은 법학 전공한 교원이 대체로 한 학과에 한 명뿐일 사회교육과가 아니면 갖기 어려울 테니 말이다.
밤늦게까지 연구실에 남아 있던 어느 해 봄이었다. 문밖에서 바스락거리는 소음이 들리더니 이내 자박자박 멀어지는 발소리가 났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목이 말라 복도 정수기 물을 뜨러 나왔더니 문에 “소블리 법교수님”이라 적힌 종이 푯말이 붙어 있었다. 이름 중 한 글자와 러블리(사랑스러움)의 두 글자를 따서 그렇게들 부른다 했다. 스승의날에 맞춰 학생들이 준비한 일회성 이벤트임을 알면서도 충만히 기뻤다.
몸이 선득하게 찬 개구리보단 피가 더운 닭이, 불특정의 닭 중 하나보단 누군가의 백구가, 추억 속 백구보단 지금 여기 함께하는 법교수가 더 마음에 들었으니까. 별명의 변천만 본다면 오늘의 난 적어도 어제의 나보단 ‘내가 바라는 나’에 다가선 셈이다.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