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들, 책에서 ‘고유의 사유’ 기대
전문성·신뢰성 부족에 “속은 느낌”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광화문점 베스트셀러 진열대에 책들이 진열돼 있는 모습. 연합뉴스
‘OO북스’, ‘문학OO’, ‘OO출판사’, ‘O컨설팅’, ‘플레이OOO’, ‘OOOO연구학회…’
최근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게시글에 적힌 목록의 일부다. 평범한 출판사 이름의 나열 같지만, 사실 일종의 ‘블랙 리스트’다. 독서를 좋아하는 이들이 주로 찾는 이 커뮤니티에서 이 목록이 블랙 리스트 취급을 받은 이유는 하나다. 생성형 인공지능(AI)을 사용해 책을 만들어내는 출판사로 의심되는 곳들이기 때문이다. 게시글의 댓글엔 자료를 영구 박제하자는 것부터 다른 이들이 찾아낸 AI 사용 의심 출판사를 제보하는 내용도 달렸다.
AI의 사용이 보편화되며 출판계에도 이를 책 제작에 사용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문제는 인간 저자가 아닌 AI가 주도해 책을 만들어내는 일명 ‘딸깍 출판’을 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곳들이 늘어나며 시작됐다. 일부 독자들은 AI 사용 출판사들의 책이 너무 많다며 ‘피로감’을 호소하기도 한다.
최근 논란의 중심에 섰던 출판사 루미너리북스는 2024년부터 2025년 약 1년 사이 9000여권의 책을 펴내며 논란이 됐다. 이들은 책 출간 과정에 AI를 적극 활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다루는 분야는 고전이나 경제학 서적부터 인문학, 자기 계발, 패션, 식음료까지 다양했다. 저자는 주로 ‘A출판사 ○○출판 에디팅팀’이라고 표기했다.
이 출판사가 AI 사용 사실을 숨긴 것은 아니다. 이들은 최근 입장문을 통해 “AI는 이미 출판을 포함한 다양한 산업에서 생산성과 품질을 높이는 유용한 도구로 자리 잡았으며, 이를 활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했으나, 책은 당연히 인간 저자가 썼을 것이라고 생각한 독자들은 일종의 ‘배신감’을 느꼈다.
대학원에 재학 중인 김모씨(38)는 최근 온라인 전자책 서점에서 전공 관련 책을 검색하면서 ‘AI 사용 출판사인지’ 확인한다. 그는 “장바구니에 담아놨던 책이 뭔가 이상해서 자세히 살펴보니 AI로 만든 책이었다. 실망감이 들면서 화가 났다. 책은 다른 분야와 달리 아직까지는 신뢰성이 있는 매체라고 생각하는데, AI로 만든 책은 아무리 잘 정리했다고 해도 해당 분야의 전문 서적이라는 느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 장바구니에서 지웠다. 거짓말에 속은 느낌이었다. 이런 것까지 살펴야 하니 피곤하다”고 말했다. 한 인터넷 사이트에는 한 출판사의 이름을 적고는 “여기 AI 전문 출판사인가요? 걱정되서 물어본다”는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최근엔 AI를 이용해 서양 고전 문학 번역본을 출간한 한 출판사의 책에서 책의 성격과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 등장해 AI 사용 출판에 대한 신뢰도를 낮추기도 했다. 해당 출판사는 호메로스의 <오딧세이아>, 카프카의 <변신> 등 고전 문학 번역본을 다수 출간했는데, 번역본 중 “스불재(‘스스로 불러온 재앙’을 줄인 신조어)”, “알빠노(‘네 사정은 알 바 아니다’라는 의미의 신조어)” 등이 쓰여 논란이 됐다.
AI가 일상생활을 비롯해 공적인 업무에도 폭넓게 활용되는 시대지만, 사람들은 책만큼은 그 현상에서 벗어나 있기를 바라는 듯하다. 이는 다른 창작물들과는 다르게 책에는 저자 고유의 사유가 담겨 있다고 생각하는 인식 때문으로 보인다.
한 출판계 관계자는 “아직까지 책은 ‘지식의 보고’라는 이미지가 있다. 저자의 전문성이 녹아 있거나 한 인간이 세계에 대해서 사유한 철학적인 문장이 책 속에 담겨 있다고 믿었는데, 이를 AI가 작성했다고 하면 실망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