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자리에서 누군가를 마주할 때, 우리 안에서는 보이지 않는 탐지기가 작동한다. 상대의 말투, 표정, 그리고 전해지는 분위기를 통해 우리는 서로의 거리를 가늠한다. 서로에 대한 경계심이 녹아내리기까지는 제법 긴 시간이 필요하다. 매스컴이나 글을 통해 이미 나를 접한 이들은 마치 오랜 지인을 대하듯 편안한 표정으로 다가온다. 익숙함은 우리 몸과 마음에 자리 잡은 경계의 문턱을 낮춘다.
이 세계는 사실 수많은 인위적 선들로 가득 차 있다. 지도에서 볼 수 있는 경계선은 물론이고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사람들을 갈라놓는 이념과 계층의 선까지. 삶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그런 선들을 내면화하고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경계선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적절한 경계선은 개인의 사생활을 보호하고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하는 기초이다. 문제는 그 경계선을 고착된 것으로 파악할 때 발생한다. 내가 받아들인 혹은 내면화한 경계선을 절대화할 때 선 밖의 사람들은 함께 살아야 할 이웃이 아니라 배제의 대상이거나 위험한 사람으로 인식된다.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이분법 속에는 상대에 대한 무시와 적개심, 더 나아가 폭력의 씨앗이 숨어 있다.
공자는 ‘인’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극기복례(克己復禮)’라고 대답했다. 극기란 타인을 힘으로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서 솟아나는 탐욕과 자기중심성을 억제하는 내면의 힘이다. ‘예(禮)’ 하면 특정한 장소에서 사람들에게 기대되는 매너나 의례 절차를 떠올리기 쉽지만, 이 본뜻은 타자와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한 규범이라고 보아야 한다. 타자에 대한 이해나 관용을 넘어 상호 존중에 이를 때 세상은 평화로워질 것이다.
성서의 인물인 아브람이 받은 첫 번째 소명은 “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지리적인 이동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이 안주하던 익숙한 가치관이 작동하던 세계, 보호받던 기득권의 울타리를 박차고 나가 낯선 땅의 ‘거류민’이 되어보라는 초대였다. 그것은 취약함으로의 초대라 할 수 있다. 나그네는 환대와 적대 사이의 긴장을 온몸으로 겪을 수밖에 없다. 그 위태로운 자리에 서보지 않으면 타자들을 이해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낯선 타자의 얼굴을 마주하고 끊임없이 그를 향한 사랑을 선택할 때, 그래서 그의 얼굴에서 하나님을 볼 때 비로소 인간의 윤리가 완성된다”고 말했다. 슬프게도 오늘날에는 가장 고귀해야 할 종교와 신념마저 사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칼날로 쓰이고 있다. 성찰 없는 확신은 빛이 아니라 불꽃이 되어 타자를 태운다.
밤새 내린 눈이 대지를 덮으면 바로 어제까지 분명했던 경계선들이 자취를 감춘다. 세계는 변함없이 그곳에 있지만, 인간이 그어놓은 경계들은 지워진다. 사람들이 그러한 광경 앞에서 함부로 설원에 뛰어들지 않는 것은 경계선이 사라진 세상을 얼핏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 순백의 공간은 우리를 맑고 투명하고 깨끗한 세계로 초대한다. 파스칼도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고 말했다. 압도적인 크기 앞에 설 때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 숭고함이다. 내 상처, 내 이익, 내 감정에 몰두하던 이들도 더 큰 세계의 개시 앞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다. 그 자리에 서는 순간 이웃들은 배제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이 세상에 잠시 초대받은 손님으로 인식된다.
경계선을 인위적으로 지우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그 경계선을 배제의 선으로 삼지 않으려는 성숙함이 필요하다. 이 거칠고 냉소적인 세상에서 자기 욕망의 문법에 따라 처신하지 않고 낯선 이들의 고통을 상상하고, 그들의 어려움을 어떻게든 덜어주려는 마음을 품어야 할 때이다. 우수 절기다. 얼어붙었던 물이 풀리듯, 굳어 있던 경계의 마음도 풀려야 한다. 역사의 봄은 선을 더 굵게 긋는 사람들에 의해 오지 않는다. 경계 위에 서서 타자를 향해 한 걸음 내딛는 사람들에 의해 시작된다.
김기석 청파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