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은 우리의 삶을 혁명적으로 바꾸고 있다. 생성형 AI는 인간의 지식 생산과 소비를 돕는 강력한 비서가 되었고, 우리는 이전보다 훨씬 빠르고 효율적으로 정보를 다룰 수 있게 되었다. 한때 오랜 독서와 사유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었던 지식의 산맥들이, 이제는 손바닥 위의 작은 화면 속에서 순식간에 펼쳐진다. 이것은 분명 축복이다. 그러나 동시에 조용하고도 깊은 위기이기도 하다.
최근 교육 현장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들은 이 위기의 징후를 보여준다. 학생들은 긴 글을 읽는 데 어려움을 느끼고, 문장의 의미를 따라가지 못한 채 멈춘다. 성인들도 요약된 정보에는 익숙하지만, 맥락을 따라가는 독서에는 점점 낯설어지고 있다. 생성형 AI는 지식 접근의 장벽을 낮추었지만, 그 대가로 인간 내면에서 이루어지던 사유의 긴 여정을 대신 수행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편리함을 얻는 대신, 생각하는 시간을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AI 시대의 그늘: 사고의 외주화
이것은 ‘사고의 외주화’라고 부를 수 있다. 인간이 스스로 질문하고 탐색하며 사유하던 내면의 지적 근육이 점차 인공지능 시스템에 의존하게 되는 현상이다. 문제는 단지 지식을 쉽게 얻는 데 있지 않다. 그 지식이 ‘나의 것’이 되는 과정이 생략된다는 데 있다.
독서는 단순한 정보 습득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정신 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자신의 세계로 돌아와 그것을 재구성하는 창조의 과정이다.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한 인간의 사유의 궤적을 따라가는 일이자, 자신의 정신을 확장하는 일이다. 그러나 AI가 요약해준 지식 속에서는 이 여정이 사라진다. 출발도, 방황도 없이 곧바로 도착지만 남는다. 나는 이 점에서 우리가 ‘다시 책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산업화 시대의 이상적인 시민상은 ‘부자시민’이었다. 가난을 극복하고 잘사는 것이 삶의 목표였다. 시민들은 묵묵히 일했고, 그 노동 속에서 산업화의 기적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1970년대 말과 1980년대를 지나면서 시민들의 의식은 변화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밥만 먹고 사는 삶’에 만족하지 않고 민주주의와 자유를 요구했다. 이 시기의 이상적인 시민상은 ‘민주시민’이었다. 거리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일터에서 시민들은 스스로의 권리를 주장하며 역사의 방향을 바꾸어갔다.
이제 우리는 선진국의 문턱을 넘어섰다. 나는 지금, 새로운 시민상을 꿈꿀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독서 교양시민’이다. 김구 선생이 꿈꾸었던 문화강국의 시민, 책을 통해 자신을 확장하고 사유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는 시민이다.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외출하는 시민, 책을 통해 생각을 나누는 공동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도달해야 할 다음 단계의 시민상이다. 오늘날 한국은 세계 3대 AI 강국을 목표로 국가적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과거 발전국가가 산업화를 추진했던 것처럼, 이제는 AI 산업을 중심으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필요한 일이다. AI 기술은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자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AI 강국은 기술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인문학적 창의성과 상상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AI는 단지 도구에 불과하다. 독서는 바로 그 창의성을 길러내는 토양이다. 나는 이 점에서 AI 강국과 독서국가는 반드시 함께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행히 최근 독서국가를 향한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다. 국회 교육위원회가 나섰다. 김영호 위원장의 리더십하에 황석영, 허영만, 유홍준, 유홍림, 유시춘, 박준 등 많은 이들이 독서문화 확산을 위해 뜻을 모으고 있다. 나도 참여하고 있다. 이는 보수와 진보, 여야를 넘어, 우리 공동체가, 국가가 해야 할 일이다.
이제 우리는 독서국가를 만들기 위해 구체적인 실천에 나서야 한다. 나는 독서 가정, 독서친화도시, 독서 중점학교가 연결되는 독서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독서’ 가정·친화도시·중점 학교
무엇보다 어린 시절부터 책과 가까이하는 문화가 필요하다. 자유학기제를 ‘독서 자유학기제’로 운영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독서 친화적 도시를 만드는 것이다. ‘아동친화도시’ ‘평생학습도시’처럼, 도시 전체가 독서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모델이다. 작은 서점이 지역 공동체의 문화 허브가 되고, 마을 도서관이 시민들의 사유 공간이 되며, 거리 곳곳에서 책을 만날 수 있는 도시. 그런 도시를 꿈꾸어보자. 도시에 존재하는 작은 서점들이 독서 커뮤니티의 허브로 기능하도록, ‘북카페형 공간’으로 재구조화되도록 지자체가 재정 지원을 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인천교육청의 ‘읽걷쓰’(읽기·걷기·쓰기), 서울교육청의 ‘북웨이브’, 서울시의 ‘야외도서관’과 같은 정책들은 그 가능성을 보여준다.
나는 특히 ‘독서 가정’이 독서국가의 토대라고 생각한다. 학부모가 책을 읽고 아이와 함께 나누는 가정, 그리고 지역사회에서 독서문화가 확산되는 사회 말이다. 나는 학부모가 가정에서의 ‘독서 리더’가 되고, 나아가 마을공동체의 독서문화를 진작하고 이끄는 독서 리더로서 역할을 하는 소망도 가져본다.
요즘 ‘반려도서(companion book)’라는 말을 자주 떠올린다. 반려동물처럼 우리 삶 곁에 늘 함께하는 책이다. 삶의 어느 순간 우리를 위로하고 방향을 제시해주는 책이다. 모든 시민이 한 권 이상의 반려도서를 갖는 나라, 그것이 진정한 독서국가일 것이다.
AI 시대는 인간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기계가 점점 더 많은 것을 대신하는 시대에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기계의 인간화’라 표현할 수 있는 AI 시대에, 우리는 암기 중심 교육으로 학생들을 평가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기계화를 촉진하는 일이다. 이제 전환해야 한다.
나는 그 답이 독서 속에 있다고 믿는다. AI 강국은 독서국가 위에서만 완성될 수 있다. 기술은 국가를 강하게 만들지만, 독서는 인간을 깊게 만든다.
그리고 깊은 인간만이, 위대한 나라를 만들 수 있다.
조희연 전 서울시교육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