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서의 은밀한 매력
이재정 지음
푸른역사 | 416쪽 | 2만7900원
<자치통감강목사정전훈의> 권20의 1장 앞. 선장본으로 제본한 이 책은 가운데를 펼치면 글자가 ‘광곽’ 또는 ‘사주’라고 하는 긴 사각형 테두리 안에 있다. 국립중앙도서관·푸른역사 제공
사극에서 서고는 종종 로맨스의 배경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로 서가의 책에 눈길이 머문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눈여겨보면 책들이 서있지 않고 누워 있다. 옛 책은 종이와 표지가 빳빳하지 않아 세울 수 없었기에 주로 뉘어서 보관했기 때문이다. 옛 책의 제본 방식인 ‘선장본(線裝本)’은 반으로 접은 종이를 쌓은 다음 실로 묶는 것인데, 오늘날 책과 가장 비슷한 형식이다. 흰 건 종이요, 검은 건 글씨인 이들 고서도 ‘알고 보면’ 제각각이다. 손으로 쓴 것, 활자로 인쇄한 것, 목판으로 인쇄한 것이 있고, 책 크기, 글자 크기, 서체도 다 다르다. 깨끗하고 윤이 나는 책이 있는가 하면, 꼬질하고 너덜한 책도 있다.
<고서의 은밀한 매력>은 옛 책을 ‘보고 감상하는 대상’으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책이다. 흥미로운 지점은 그 내용이 아니라 ‘편집’에 주목한다는 점이다. 국립중앙박물관 등에서 고서를 전시·연구해온 저자는 표지, 제목, 본문과 주석의 배치, 글자 크기, 문단 나누기, 띄어쓰기, 본문 밖 여백 그리고 소장자의 흔적까지 옛 책을 ‘보고 관찰하는’ 방법을 꼼꼼히 풀어놓는다.
책은 왜 책(冊)일까. ‘冊’은 글자가 적힌 동일한 크기의 나뭇조각 여러 개를 끈으로 엮은 모습을 본뜬 글자로 풀이된다. ‘가지런하다’는 뜻의 ‘등(等)’은 책을 구성하는 나뭇조각인 ‘간(簡)’을 정돈하는 행위로도 설명된다. 우리가 목간, 죽간이라고 부르는 것들이다. 목간이 말려 있는 모습을 가리키는 글자가 ‘권(卷)’이다. 오늘날의 책과는 모습이 한참 다른 ‘冊’ 관련 명칭을 지금도 사용하는 이유는 목간에 이르러 ‘책’을 정의하는 요소들이 갖춰졌기 때문이다. 목간은 여러 조각을 연결하여 오늘날의 책처럼 많은 글자를 기록할 수 있고, 가지고 다닐 수 있었다. 내용 면에서도 경전, 문서, 일기, 글쓰기 연습 등 다양하다. 고서의 글쓰기 방식, 책의 형식도 목간에 연원을 두고 있다.
<월인석보> 권1. <월인석보>의 권1을 열면 제일 먼저 나오는 내용은 <월인석보>나 <석보상절> 서문이 아니라 <세종어제훈민정음>이다. ‘훈민정음’ 하면 떠오르는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로 시작하는 서문이 여기에 처음 나온다. 서강대학교 도서관·푸른역사 제공
세종 때 ‘자치통감강목사정전훈의’는 편집에서 서체까지 완벽
세조 때 ‘월인석보’ 보면 한글 표기와 보급을 고민한 흔적 있어
이처럼 저자는 동아시아에서 책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목간, 불경을 새긴 금속판, 돌에 새긴 책이라 할 수 있는 비석 등 종이책 이전의 ‘책’은 물론 선장본, 두루마리, 절첩본에 이르기까지 책의 형태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소개한다. “편집에서 서체에 이르기까지 나무랄 데 없는 명품”으로 소개하는 책은 1438년 세종의 명으로 간행한 <자치통감강목사정전훈의>(강목훈의)이다. 이 어려운 제목은 ‘자치통감’ ‘강목’ ‘사정전’ ‘훈의’ 네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자치통감>은 북송 때 학자 사마광이 전국시대 주나라 위열왕부터 오대십국시대 후주 세종까지 1362년 역사를 연대순으로 서술한 책이다. 이를 성리학의 창시자 주희가 중요 사항을 ‘강’, 세부 사항을 ‘목’으로 다시 쓴 것이다. 세종이 신하들과 책을 편찬한 장소가 ‘사정전’이고, ‘훈의’는 뜻을 풀이한다는 의미다.
<강목훈의>는 149권, 책 수로는 76책으로 분량이 엄청나다. 수십 개 왕조를 나누고,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편집하고, 각각의 분량에 큰 차이가 없도록 나누는 작업이 보통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1책 전체를 서문과 목차만으로 구성했으며, 책 표지에도 위치와 크기를 달리한 표제를 통해 읽는 사람의 편의를 도왔다. 대제목, 책차, 횡제목과 같은 요소다. 책의 아랫면에 ‘서근제’라는 표시도 있다. 옛 책은 뉘어서 보관했기에 쉽게 찾을 수 있게 한 것이다.
보기에 불편한 권자본과 절첩본을 개선한 선장본은 본문 레이아웃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글자가 들어있는 사각형 테두리를 ‘광곽’ 또는 ‘사주’라 하며, 종이 좌우의 여백은 종이를 모아 묶을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종이가 좌우로 접히는 한가운데는 ‘판심’이라 하며, 위아래에 물고기 꼬리 모양의 ‘어미’라는 표시가 있다. 책의 기초적인 정보를 ‘판식’이라 하는데, <강목훈의> 권20의 경우 사주쌍변(네 변의 테두리 선이 각각 두 개)에 상하화문어미(위아래 꽃 모양의 어미)이다.
이처럼 고서는 만듦새만으로도 수많은 정보를 알아낼 수 있다. “컴퓨터에 입력된 서식에 따라 편집하는 요즘에도 그리 만만한 작업이 아닌 것을 오로지 손과 눈으로만” 해낸 노고 역시 느낄 수 있다.
한글책이 귀하기 때문에 한글이 조금이라도 있는 책이면 값이 더 올라간다는 얘기도 흥미롭다. 책에서 대표적으로 언급하는 한글 고서는 <월인천강지곡> <석보상절> 그리고 <월인석보>다. 세종의 비 소헌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수양대군이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석가모니의 일대기 <석보상절>을 지었고, 세종이 석가모니를 찬양하는 내용을 노래 가사로 지은 것이 <월인천강지곡>이다.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른 뒤 둘을 합친 것이 <월인석보>이다. ‘훈민정음’ 하면 떠오르는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로 시작하는 서문은 <월인석보> 권1 맨 앞에 실려 전한다. 이들 책은 고딕체(돋움체)를 떠올리게 하는 한글 서체를 비롯해 한글 표기법, 한자와 한글의 크기와 배치 방식 등 한글을 어떻게 표기하고 활용, 보급할까 고민한 흔적도 남아있다.
저자는 책의 디자인과 삽화, 습기와 해충에 맞서는 노력, 책의 내력을 다양하게 고서로부터 읽어낸다. 이러한 “하나의 책에 켜켜이 쌓여 있는 사람들의 흔적은 이 책을 애지중지하고, 여백에 시구나 문장을 적어 가며 아마도 과거시험 준비를 했을 어떤 사람 또는 사람들을 상상하게 한다”는 저자의 말이 옛 책을 보는 시야를 넓힌다.
흔히 박물관에서 고서를 보면 그저 시간의 흐름을, 비석에선 돌덩이의 형상만을 바라보던 이들에게 고서의 숨겨진 매력을 발견하도록 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