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출신 피아니스트들 이름 앞에 관용적으로 붙는 수식어가 있다. ‘러시아 피아니즘의 OO’이라는 표현이다. 지난 12~13일 이틀간 서울시향과 협연했던 러시아 피아니스트 니콜라이 루간스키 공연에 관한 기사나 홍보 자료에는 러시아 피아니즘의 상징, 러시아 피아니즘의 정수, 러시아 피아니즘의 계보를 잇는…과 같은 설명이 쉽게 눈에 띈다. 러시아 피아니즘을 키워드로 놓고 검색하면 우리가 아는 수많은 피아니스트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지난해 방한해 국립심포니와 협연했던 엘리소 비르살라제는 ‘러시아 피아니즘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린다.
러시아 피아니즘(pianism)은 러시아의 피아노 연주 전통과 체계화된 스타일을 일컫는다. 강렬한 타건, 깊고 두터운 음색, 감정의 극단적 대비, 단단하고 응축된 에너지의 밀도 등이 주요한 연주 특징으로 흔히 묘사된다. 이 계보로 묶이는 대표적인 피아니스트로는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테르, 에밀 길렐스, 엘리소 비르살라제(조지아 출신), 그레고리 소콜로프, 예브게니 키신 등을 꼽을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루간스키도 마찬가지다.
러시아 피아니즘의 중심 축은 모스크바 국립음악원이다. 160년 전통을 가진 이 학교는 차이코프스키가 초창기 교수를 지냈던 곳이며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곡가 라흐마니노프, 스크리아빈을 배출했다. 서유럽이 여러 도시와 전통이 공존하는 구조였다면 러시아는 모스크바 국립음악원을 중심으로 악곡분석과 작곡가 의도에 대한 치밀한 접근, 끈끈한 사제 계보를 통해 이 전통을 떠받쳤고 이어갔다.
탁월한 음악 교육자들이 많았는데 특히 겐리흐 네이가우스(1888~1964)는 러시아 피아노 교육의 중심이자 상징적 인물로, 이곳에서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며 러시아 피아니즘이라는 유산의 토대를 만들고 다진 것으로 평가받는다.
12일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니콜라이 루간스키가 서울시향과 협연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러시아 피아니즘이 있다면 다른 나라들은 어떨까. 피아노 음악의 종주국이라고 할만한 독일이나 프랑스 피아니즘과 같은 표현도 있을까. 특정 교수를 중심으로 한 학파나 계보의 특징을 일컬으며 ‘프렌치 스쿨’(French School)과 같은 표현은 종종 사용된다. 하지만 ‘러시아 피아니즘’만큼 강렬한 국가적 정체성을 갖고 널리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세계 음악계에서 차지하는 러시아 피아니즘의 존재감은 근현대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사회주의 혁명 이후 외부와의 교류가 단절된 채 독자적인 전통을 유지해왔으며 체제 우수성을 증명하는데 예술을 활용해 왔다. 음악평론가 장일범은 “혁명 이후 ‘소비에트연방’, 즉 소련이라는 그들만의 분리된 공간에서 독자적·순혈적 전통이 유지되어 왔고, 이같은 스타일은 서구 음악계에 강렬한 인상과 충격을 줬다”고 설명했다.
국내 피아니스트 중에서는 임동민, 임동혁 형제가 모스크바 국립음악원에서 오랫동안 공부했다. 특히 임동혁은 인터뷰 때 종종 자신의 음악적 뿌리가 러시아 피아니즘에 있음을 밝히곤 했다.
한편 지난 12일 루간스키가 들려줬던 쇼팽피아노협주곡 1번은 폭발적 에너지를 드러내기보다는 음표 하나하나를 다채롭고 중후하게 채색하는 듯한 해석으로, 관객들의 고정관념을 살짝 비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