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화(乳化)는 물과 기름이 섞인 상태를 일컫는다. 유화의 한자를 보면 이상하다. 기름 유(油)를 쓰지 않고 왜 젖 유(乳)를 쓸까? 물과 기름이 완벽하게 섞이면 빛의 난반사가 일어나 액체가 뿌옇게 보이는 불투명한 상태가 된다. 설렁탕 국물이 뽀얗게 우러난 모습이다. 마치 ‘우유처럼 변한다’의 의미로 유화라고 한다. 영어 단어 에멀션(emulsion)의 어원도 라틴어로 젖을 짜다의 의미인 ‘에물게레(Emulgere)’에서 왔다고 한다.
우리는 국물 요리를 만들 때 국물이 뽀얗게 우러나오는 것을 최고로 친다. 소나 돼지의 뼈를 우릴 때 국물이 뽀얗게 되는 시점을 완성으로 여긴다. 진할수록 좋다고 믿는다. 유화는 단백질과 지방이 결합하면서 일어난다. 사골을 고면 지방이 뜨거운 물에 녹아 나오고, 단백질의 일종인 콜라겐은 젤라틴으로 분해된다. 이 지방과 젤라틴이 결합하며 유화가 진행된다. 사골에 들어 있던 아미노산도 함께 추출되어 유화를 돕는다. 젤라틴과 아미노산에 붙잡힌 미세한 기름 방울이 빛을 반사해 국물이 우유처럼 뽀얗게 보이게 한다.
이는 사골뿐 아니라 생선 뼈를 고아도 마찬가지다. 미역국을 끓일 때 참기름에 볶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미역의 아미노산이 사골의 젤라틴을 대신할 뿐, 유화라는 기본 원리는 같다. 얼마 전 끝난 <흑백요리사>에 출연한 윤주모 셰프의 황태국 레시피가 화제였다. 그는 황태를 두들기고 살을 발라낸 뒤 남은 뼈와 머리까지 들기름에 볶았다. 물을 부어 완성한 것은 한 그릇의 뽀얀 황태국이었다. 진한 국물에 열광하는 대중을 보며 뽀얀 국물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새삼 실감했다.
뽀얀 국물을 추종해서 한동안 설렁탕에 커피 크림이나 분유를 넣는다는 이야기가 돌았고, 점검 결과 일부 업체가 실제 적발되기도 했다. 뽀얀 국물을 선호한 대가로 우리는 텁텁한 곰탕을 먹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공품 곰탕이 그렇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사골을 우리고 기름을 걷어내는 과정을 거쳤다. 그러나 기술이 발전하면서 지방을 걷어내지 않고 나노 단위로 분쇄하는 방식이 등장했다. 깔끔한 맛이 나던 사골 곰탕은 걷어내지 않은 지방 때문에 텁텁해졌고, 대신 국물은 더 진해 보이게 됐다. 눈에 보이는 뽀얀 국물을 위해 맛을 포기한 것이 아닌가 한다. 대기업 식품회사의 고체 소고기 조미료에 굳이 필요 없는 탈지분유가 들어가 있는 것도 ‘국물은 진해야 한다’는 믿음을 이용한 결과일 것이다.
황태국이나 미역국의 뽀얀 국물을 좋아하는 이도 있겠으나, 나는 맑은 국물이 더 좋다. 밖에서 사 먹을 때, 엄마가 끓여 줄 때처럼 진짜 참기름이나 들기름을 쓰는 대신 식용유로 볶아낸 뽀얀 국물은 사실 텁텁하다. 가끔 황태국이나 미역국을 끓일 때 기름에 볶지 않고 맑게 끓인다. 눈에만 보기 좋은 뽀얀 국물보단 맑게 끓인 국물을 더 좋아라 한다. 게다가 재료가 지닌 맛이 더 도드라져 좋아한다.
황태국에는 뽀얀 국물이 아닌 황태가 중요하고, 미역국에는 미역이 중요하다. 사골 또한 마찬가지다. 진한 국물이라고 꼭 뽀얀 것만은 아니다. 보기에만 좋은 것이 많은 세상이다. 보기 좋은 것이 먹기에도 좋을 수 있겠지만, 그 좋음을 위해 맛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싶다. 눈보다는 코와 입이 더 즐거운 음식을 찾자.
김진영 31년차 식재료 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