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향과 서권기의 표상, 추사 김정희. 그의 작품은 당대를 넘어 지금도 독보적이란 평을 받는다. 그러나 학문과 인생의 길은 결코 평탄치 않았다. 말년에는 정쟁에 휘말려 제주도로 유배됐다.
그의 나이 쉰다섯, 날카로운 가시로 뒤덮인 탱자나무 울타리 속에 위리안치된 채, 회한과 그리움, 애절함으로 점철된 8년여를 제주 대정에서 보냈다. 사랑하는 이들과 생이별하고, 낯선 땅에 몸과 마음이 버려졌으니, 그 삶이 얼마나 처절했으랴.
궁박하고 모진 외로움 속에서도 그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제주도의 풍광과 식물이었다. 그는 제주의 풍토와 인물을 ‘우둔하고 무지하다’고 혹평하면서도, ‘한라산의 신령스럽고 충만한 기운이 초목에만 모인 것’이라 한탄했다. 제주도민에게는 매우 불손하게 들릴 법한 말이다.
그럼에도 추사는 겨울에도 푸르른 제주의 나무와 화훼를 보며 감탄했다. 기이한 구경거리가 많은 곳이라 했고, 육지에서는 보기 드문 상록수와 이름 모를 꽃이 많은 것도 신기해했다. 그중에서도 수선화를 ‘천하의 구경거리’라며 각별히 칭송했다. 그는 ‘수선화가 정월 그믐에 피어, 2~3월이면 산과 들, 밭두둑 사이가 흰 구름이 질펀하게 깔린 듯, 혹은 흰 눈이 광대하게 쌓인 듯하다’고 전한다.
추사는 이미 중국에서 수입된 수선화를 알고 있었지만, 제주에 수선화가 지천으로 널린 모습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이를 귀히 여기지 않고, 소나 말의 여물로 쓰거나 잡초로 여겨 호미로 파내고 원수처럼 대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수선화는 중국에서 수입되며 조선에 알려졌으나, 정작 제주에서는 오래전부터 자생해왔다. 추사가 제주로 귀양 가기 전까지는 한양의 사대부들이 그 사실을 몰랐던 듯하다. 이러한 사정은 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도 실려 있다. 중국 수선화를 조선에 소개한 인물은 김창업이었다. 17세기 말, 그는 중국 북경을 다녀온 지인에게서 비싼 값에 수선화를 구매했다. 19세기에는 수선화 수입 열풍이 지나쳐 국가에서 금지령까지 내릴 정도였다. 제주 수선화가 한양 선비들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김정희 덕분이었다. 훗날 이유원은 <임하필기>에 ‘제주도에 자생하는 수선화는 추사가 처음 알았다’고 기록했다.
추사가 ‘천하의 구경거리’라고 칭송했던 수선화의 계절이 다시 돌아왔다. 꽃 지기 전에 놀러 오라며 재촉하는 제주의 오랜 벗 전갈이 반갑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