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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 통역되나요?

입력 2026.02.24 20:07

오늘도 통역기를 낀다. 스페인어 통역사는 두 명인데 스타일이 극단적으로 다르다. 한쪽은 손짓까지 섞는 열정의 라티노이고, 다른 한쪽은 늘 무덤덤하다. 한쪽은 같이 흥분하고 울부짖지만, 다른 쪽은 감정의 톤을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인다. 그래서 통역기가 들려주는 말은 원뜻과 전달자의 체질이 뒤섞인, 탁하지만 발랄한 소통의 언어가 된다.

통역이라는 인간의 일도 조만간 인공지능에 자리를 내어줘야 한다고들 말한다. 인간의 섬세함이냐 기계의 균일성이냐, 논쟁은 길지만 결론은 짧다. 따질 틈도 없이, 당장 통역사를 고용할 돈이 없다. 국제회의가 일상인 국제기구의 새로운 풍경이다.

사실, 투정할 일도 아니다. 인간이든 기계든, 통역의 정확성은 이미 부차적이다. 통역이란 본디 서로 다른 언어가 한자리에서 같은 방향을 보게 하는 작은 기계이자 연결장치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통역기는 ‘연결’이 아니라 ‘오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보험’이 되었다. 다리를 놓는 일이 이제는 난간을 세우는 일이 되었으니, 다리 위에서 만난 사람들은 서로를 피하는 법부터 먼저 배운다. 통역은 정확한데, 사람들은 좀처럼 연결되지 않는다. 통역기를 통해 이어지는 세계는 그렇게 조용히 축소된다.

어제는 그랬다. 가장 힘이 센 나라가 분담금을 내지 않아, 한 국제기구가 대규모 해고를 검토해야 하는 처지에 몰렸다. 비상대책회의가 열렸고, 수많은 언어가 통역을 통해 부딪쳤다. 그러나 누구도 그 상황을 자초한 나라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누구도 ‘제 아비의 이름’을 부르지 못한 자리에서, 그 ‘아비’가 먼저 일어나 구조조정에 대한 꼼꼼하고 가차없는 조언을 남겼다. 통역은 정확했다. ‘아비’가 자초한 결핍을 ‘자식’의 절제 탓으로 돌리며 훈수하는 그 어처구니없는 문장들까지도.

그래서 통역의 오류가 오히려 길을 열어주던 시절이 가끔 그립다. 1977년 겨울,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바르샤바에서 폴란드 국민의 ‘열망’을 이해한다는 취지로 말했을 때, 통역은 그 말을 어딘가 지나치게 육체적인 ‘욕망’으로 옮겨 버렸다고 한다. 대통령이 폴란드를 ‘원한다’는 말로 들렸으니, 세계 정치가 한순간에 민망한 농담이 된 셈이다. 오역은 외교의 권위를 구겼지만, 묘하게 긴장을 풀었다. 무엇보다 그 시절엔 그런 실수가 ‘사고’이면서도 ‘사과’로 수습될 수 있었고, 대통령이 통역사에게 고맙다는 편지를 보냈다는 뒷이야기까지 전해진다. 지금 회의실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관대함이다.

‘글로벌’이 사라지는 방식은 거창하지 않다. 탱크나 미사일보다 먼저, 문장 속에서 흔적이 옅어진다. 한때 ‘글로벌 스탠더드’ ‘세계공동체’는 이메일 첫 줄 인사처럼 자연스러웠다. 요즘은 그 말이 괄호 속으로 밀려나고, 괄호 안에서도 ‘가능하면’ ‘원칙적으로’ ‘상황이 허락하면’ 같은 사족이 늘어난다. 문장이 길어질수록 세계는 작아진다.

서로를 부르는 방식도 바뀐다. 한동안 나는 메시지 첫 줄에 ‘잘 지내시지요’를 거의 자동으로 썼다. 뜻이 없어서 더 의미 있던 문장, 어디에 있든 안부를 묻는 최소한의 약속. 그런데 최근 내 손은 자꾸 ‘as per’를 먼저 친다. 인사보다 ‘규정에 따라’ ‘절차상’이 앞선다. 사람을 부르기 전에 규정을 부른다. 친숙한 인사가 오해될까 두려워지니, 나를 지킬 언어부터 내세운다.

다자주의의 소멸은 내게 제도의 붕괴가 아니라 감정의 소실에 가깝다. 합의가 안 되는 게 아니라, 합의하려는 기분이 사라진다. 문서에서는 ‘결정’이 ‘요약’으로, ‘약속’이 ‘검토’로 바뀐다. 원칙은 낡은 포스터가 되고, 실용은 면죄부가 된다.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말도 흔해지고, 그 말은 대개 누군가의 삶을 더 현실적으로 어렵게 만든다. ‘연대’는 따뜻했는데 이제는 부담이 되고, ‘공동’은 목표였는데 비용으로 먼저 읽힌다. 지구는 둥근데 우리는 회의가 끝날수록 모서리를 만든다.

우리는 세계를 공평하게 나누어 갖지 못해 글로벌에 실패했다. 대신 세계를 포기하는 속도만큼은 놀랍도록 공평해지고 있다. 접힌 세계는 다시 펴기 어렵다. 종이 지구본처럼, 한 번 생긴 주름은 끝내 남는다.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세계’를 말한다. 다만 이제 그 말은 약속이 아니라 추억처럼 발음된다. 다자주의가 죽었다고 하고, 장례식장은 늘 붐빈다. 모두가 조문을 오지만, 아무도 상주가 되려 하지 않는다. 모두가 조문객인 세계에서는 책임도 슬그머니 조문객 자리에 앉는다.

이미 죽은 언어는 통역되지 않는다.

이상헌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이상헌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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