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도서관은 한 해 200만~300만권의 책을 버린다. 학술정보통계시스템 통계다. 2023년엔 울산대가 학교 전체 장서 92만권 중 45만권을 폐기하려 했다가 내부 논의 끝에 27만권만 정리했다. 대출 없는 책들이 우선 뽑혀 나갔다. 서가를 줄이고 디지털 열람실 등의 공간을 늘려야 도서관 이용률이 높아진다는 논리도 한 요인이었다.
읽지 않는 책을 사들이는 회사도 있다. 인공지능(AI) 모델 ‘클로드’를 개발한 앤트로픽이다. 워싱턴포스트는 앤트로픽이 책 수백만권을 사들인 뒤 유압식 절단기로 책등을 잘라내고 페이지를 고속 스캔해서 AI 모델을 학습시키는 데 사용했다고 보도했다. 끝난 책은 재활용 업체로 보내졌다. ‘파나마 프로젝트’라고 불린 이 계획은 전 세계 모든 책을 사들여 잘라 넣으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자금 부족에 시달리는 공공도서관 등이 주요 타깃이었다. 창고에 쌓인 수많은 책이 절단돼 스캔되기만을 기다리는 듯한 모습의 사진은 그로테스크했다. 마치 인간이 책장 위에 포개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사실은 앤트로픽이 몰래 불법 공유사이트에서 도서 데이터를 다운로드했다가 소송을 당하면서 알려졌다. 법원은 불법 다운로드는 저작권 침해지만, 모델 훈련에 책을 사용하는 것 자체는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책을 산 사람이 그걸 어떻게 쓰든 관계없다는 말이다. 영화감독 이송희일씨는 소셜미디어에서 “인류 지성의 보고를 마음대로 도둑질하고 그것을 사유화한 채 돈을 버는 행위가 적절한가”라고 물었다. “인공지능은 인류의 지적 공유지를 인클로저(공유지의 사유화)한다. 민주적 통제가 필요한 이유”라고도 적었다.
AI 개발에 쓰인 데이터는 인류 산물
그것으로 벌어들일 막대한 수익 대비
보편적 이용 권리는 ‘최소한의 분배’
민주적 통제와 함께 공공 환원 필요
원종우 작가는 이송희일 감독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면서도 조금 다른 의견을 내놨다. 그는 소셜미디어에서 “대중이 저 수백만권의 책에 들어 있는 지식과 정보에 포괄적으로 접근할 다른 실제적 방법이 있는가”라며 “결국 저 방대한 지식은 시간과 여건을 보유한 지적 엘리트만이 누리는 자산이 될 가능성이 큰데 AI는 지식 접근의 문턱을 낮춘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되돌릴 수 없는 흐름이라면 어떻게 공공으로 환원할 것인가를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적 통제, 공공 환원이라는 지점에서 두 사람의 생각은 모인다. AI라는 최신 유행을 걷어내고 보면 오래된 문제이기도 하다. 현재 우리가 축적한 기술이나 부는 어디서 왔을까. 특정 시점, 몇몇의 기여 덕분만은 아니다. 수백수천년간 이름 모를 이들이 흘린 피땀의 총합이다. 19세기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크로포트킨은 그래서 전체 산출물의 일정 부분은 생산조직의 모든 사람이 지분을 가져야 한다고 봤다. 나미비아 국민들이 이 나라 광물자원의 실질적 소유자이기 때문에 기본소득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주장도 같은 맥락이다.
AI 모델 개발에 쓰인 아키텍처나 데이터 역시 인류라는 땅 위에서 피어났다. 불안정 노동이 늘어나는 것도 모자라 일자리가 소멸된다는 AI 시대다. 보편적 이용 권리는 최소한의 분배일지도 모른다. 앤트로픽은 50만권에 대해 권당 3000달러씩, 약 15억달러(약 2조원)를 지불하기로 했지만 그들의 기업 가치 1830억달러(약 264조원)와 앞으로 벌어들일 수익에 비하면 소박하다.
인류학자 제임스 퍼거슨은 크로포트킨의 논의를 넘어 노동이나 시민권이 없이도 그저 여기 이 땅에 함께 살고 있는 사람이면 분배받을 자격이 있다고 봤다. 이를 ‘현존’이라는 개념으로 정리했는데, 인류애가 아니라 실용적 문제에 가깝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신생 독립국 시절 시민권이 없거나 요금을 내지 못하는 이들에게 물을 공급하지 않았다. 수도 공급망에서 벗어난 이들은 도랑과 웅덩이에서 악취 나는 물을 끌어썼고 이는 대규모 콜레라 유행으로 이어졌다. 콜레라는 빈부를 가리지 않았다. 결국 남아공은 최소한의 물을 누구에게나 공급했다.
황정은 소설 <백의 그림자>에서 주인공 무재는 “빚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뻔뻔한 거”라고 말한다. “대금이 너무 저렴하게 지불되는 노동력이라든지. 하다못해 양말 한 켤레를 싸게 사도, 그 값싼 물건에 대한 빚이 어딘가에서 발생한다는 이야기예요.” 인간이 사라진 황무지에 빚만 남기는 일이 AI의 최종 목적지는 아닐 것이다.
황경상 데이터저널리즘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