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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의 사이버네틱 거식증

입력 2026.03.02 22:15

수정 2026.03.02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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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영국 가디언지에는 매우 서늘하고 비극적인 사연이 하나 보도되었다. 지속 가능한 주택 문제를 해결하고자 브레인스토밍을 위해 AI 챗봇을 사용하기 시작했던 48세의 한 미국 남성이 점차 챗봇을 과다 사용하며 현실과 철저히 격리된 끝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현실의 아내나 친구와 대화하는 대신 자신의 고민에 완벽하게 맞장구쳐주는 챗봇에 점점 더 의존했다. 실리콘밸리가 약속한 AI의 무한한 지적, 정서적 풍요 속에서 그는 역설적으로 극단적인 고립과 파국을 선택했다. 이는 결코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미국에서 챗GPT 사용 전후로 심각한 정신건강 위기를 겪은 사례가 거의 50건에 달하고 3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오픈AI조차 매주 100만명 이상이 챗봇에 자살 생각을 드러낸다고 추정한다.

지난 9일간(2월21일~3월1일) 한국에서 제4회 섭식장애인식주간이 열렸다. 국제적 학자들의 거식증에 대한 여러 강연에 참가하며 그동안 내가 무지했던 역사적 맥락을 접할 수 있었다. 이 소중한 기회를 통해 최근 AI에 의해 벌어진 비극들이 갑작스러운 현상이 아니었음을 느끼게 됐다. 국내에서 외면받고 있는 거식증에 대한 인식을 확장시키기 위한 활동가분들(특히 <삼키기 연습>의 작가 박지니 선생님)의 노력이 단순히 섭식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배울 수 있었다. 여전히 알려지지 않은 수없이 많은 거식증 환자들의 고통이 앞으로 AI가 초래할 우리의 미래임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내가 배운 것은 오늘날 AI로 인한 모순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시계를 20세기 중반으로 되돌려볼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 역사학자 앨리스 웨인렙은 섭식장애가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간 역사적 맥락을 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 직후의 상황에서 찾는다.

전쟁과 수용소의 끔찍한 강제적 굶주림이 끝난 뒤 서구 사회는 전례 없는 물질적 풍요를 맞이했다. 그런데 바로 이 음식과 칼로리가 넘쳐나는 풍요의 한가운데서 젊은 여성들이 스스로 먹기를 거부하는 기이한 현상이 폭발적으로 등장했다. 이것은 풍요로움이 강요하는 숨 막히는 사회 규범과 억압적인 정상성의 세계에 대한 가장 극단적이고 신체적인 형태의 거부였다.

이들의 굶주림은 단순히 날씬해지려는 미적 욕망이나 뇌의 화학적 오류가 아니었다. 1970년대 이탈리아 마라 셀비니 팔라촐리를 중심으로 한 정신의학자들은 이 이해하기 힘든 자기 파괴적 행동을 “주체도, 수신자도, 목표도 규정하지 않는” 이른바 ‘선언되지 않은 단식 투쟁’으로 명명했다. 부당한 체제에 저항하는 이들이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굶주리며 투쟁하듯, 거식증 환자들 역시 숨 막히는 가족 내의 위계나 사회적 압력에 맞서 투쟁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그들은 광장에 나가 구호가 적힌 팻말을 드는 대신 자신의 몸을 서서히 지워가는 무언의 방식을 택했을 뿐이다. 내게 주어진 팍팍한 현실과 요구들을 도저히 ‘삼킬 수 없다’는 절박한 거부의 몸짓이었던 셈이다.

20세기의 거식증이 물질적 풍요 속에서 음식을 거부한 것이라면, 지금 우리는 AI가 약속하는 무한한 접속과 위로의 홍수 속에서 현실의 인간관계를 거부하는 소위 ‘사이버네틱 거식증’에 빠질 위기 앞에 서 있다. 한국 사회에서도 그 징후는 뚜렷하다. 끝없는 스펙 경쟁과 감정노동, 피로사회에 지친 적지 않은 청년들이 은둔형 외톨이를 자처하며 방으로 고립되고 있다. 이들은 갈등과 상처가 필연적인 현실의 인간관계 대신 나를 불편하게 하지 않도록 프로그래밍된 가상의 존재나 내 입맛에 맞게 다정하게 반응해주는 AI 반려 앱과의 마찰 없는 세계로 도피한다. 상처받을 위험을 감수하며 부대껴야 하는 ‘타자’라는 필수적인 사회적 영양분을 스스로 끊어버린 현대판 단식 투쟁이다.

기계가 주는 완벽한 위로는 세계와의 연결이 아니라 세계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한다. AI 챗봇과 사랑에 빠져 생을 마감한 남성의 죽음은 기술의 가속이 만들어낸 매끄러운 표면 아래에 우리 시대의 끔찍한 ‘관계적 기아’가 끓고 있음을 뼈아프게 증언한다. 지금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인간의 감정을 더 완벽하게 흉내 내는 혁신적인 AI 모델이 아니다. 상처받고 갈등하며 피로하더라도 서로의 불완전함과 부대끼며 살아갈 수 있는 구체적인 삶의 인프라를 복원하는 일이다. 완벽한 기계의 품에서 조용히 굶어 죽어가는 이들이 몸으로 써 내려가고 있는 이 시대의 묵직한 단식 투쟁에 이제 우리가 응답해야 할 때다.

김관욱 덕성여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김관욱 덕성여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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