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24일, 대구에 있는 ‘책방아이’에서 독자들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날은 대구에 대설주의보가 발표된 날이었다. 대설주의보는 통상 24시간 동안 눈이 5㎝ 이상 내릴 것이 예상될 때 발표된다고 한다. 서울에서는 곧잘 접하던 소식이라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동대구역에 도착했을 때도 놀라지는 않았다. 단지 맑은 서울 날씨와 대비되어 약간 신기했을 뿐이었다. 오히려 대구 시민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눈은 처음이라는 듯 눈을 홉뜨고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 혹시라도 넘어질까 살금살금 발을 떼는 사람, 벤치 위에 쌓인 눈을 신기한 듯 가만히 쥐어보는 사람, 장화를 신고 눈길 위를 신나게 미끄러지는 사람이 보였다. 대구에 오랜만에 큰 눈이 내렸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거센 눈발을 헤치고 책방에 도착했다. 책방 앞에는 곰을 똑 닮은 눈사람이 서 있었다. 이 커다란 ‘눈곰’을 만들기 위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힘을 합쳤을 것이다. 눈이 귀한 지역에서 눈은 이렇게 환대받는다. 물론 갑작스러운 대설 때문에 교통체증이 일어나고 크고 작은 사고 또한 있었을 것이다. “본디 대구에서 눈은 날리는 것인데, 오늘은 내리는 날이네요.” 따뜻하게 맞이해주시는 책방지기님의 말씀을 듣고 대한민국이 새삼 크게 느껴졌다. 어디는 맑은데 어디는 큰 눈이 내리는 것처럼, 누군가가 행복할 때 다른 누군가는 거대한 슬픔을 떠안고 있을지도 모른다.
밖에서 눈발이 점점 굵어질 때 책방 안은 환대와 웃음으로 점점 따뜻해졌다. 교통체증 때문에 늦게 도착한 독자님들도 계셨다. 머리와 어깨 위에 눈이 소복이 내려앉아 있었다. 미처 예상하지 못했기에 맞을 수밖에 없는 눈이었다. 끊임없이 말하면서도 나는 창밖에서 까만 밤과 하얀 눈이 만들어내는 장면을 흘긋흘긋 쳐다보았다. 북토크가 끝나자 비로소 독자님들의 말씀이 귀에 들어왔다. “차에 눈이 쌓여서 놀랐어요.” “눈 오는데 우산 쓴 거 실로 오랜만이에요.” “아까 차로 오르막을 오를 때 등 뒤에서 땀이 흐르더라고요.” 누구에게는 ‘고작’이 누군가에게는 ‘엄청’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돌아오는 길, 기준에 대해 생각했다. 대설의 기준에서 시작해 많음의 기준, 적당함의 기준, 편안함의 기준 등을 연거푸 떠올렸다. 어떤 기준은 국가에서 마련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근로기준법은 노동에 있어 처우의 최저선을 제시하고 노동자의 안전망을 마련한다. 근로기준법의 3조는 다음과 같다. “이 법에서 정하는 근로조건은 최저기준이므로 근로 관계 당사자는 이 기준을 이유로 근로조건을 낮출 수 없다.” 최저임금, 폭행 금지, 균등한 처우 등의 사항 등이 이어진다. 삶의 많은 부분이 이런 기준들로 인해 유지될 것이다. 명확할 때도 있지만 현장에서 그 기준이 느슨해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기준들이 사회를 원활하게 돌아가게 만드는 것만은 분명하다.
개인적인 기준도 중요하다. 퇴사한 직후, 친구가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잘 살고 싶어.” 친구가 웃으며 재차 물었다. “어떤 게 잘 사는 건데?” 그제야 나는 내가 ‘잘 사는 것’에 대한 기준을 마련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시에는 차차 생각하겠다고 답했지만, 커다란 질문 앞에서 번번이 쪼그라들기 일쑤였다. 다행히 다양한 일들에 발 들이면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잘할 수 있는 것과 잘하고 싶은 것의 차이를 알 수 있었다. 어떤 차이는 결코 좁힐 수 없다는 것도 배웠다. 이 과정에서 가장 흔쾌히 찍은 기준점은 이렇다. “마음이 움직이면 한다.”
마음이 움직이는 방향에 잘 사는 삶이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큰 눈이 와도 행사장을 찾는 마음들 덕분에 ‘잘’에 대한 기준이 조금 더 명확해지는 듯싶었다. 자발적으로 몸을 움직일 때 우리는 마음도 함께 실어 나르는 법이다.
오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