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심 “태아 살아서 배출됐고 피의자 고의성 짙어…낙태죄 해당 안 돼”
헌재 ‘낙태죄 폐지’ 결정 후 입법 공백 이유로 3년형에 집행유예 선고
‘임신 36주차 임신중지’ 경험을 유튜브에 올려 파장을 일으킨 산모 권모씨(27)에게 1심 재판부가 살인죄를 인정했다. 법원은 권씨가 태아가 죽는다는 걸 미필적으로나마 알고 있었다면서도 “2019년 4월11일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폐지 이후 국회 입법이 이뤄지지 않아 여성의 자기결정권 행사에서 공백과 혼란이 이어지고 있다”며 형 집행을 유예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3부(재판장 이진관)는 4일 살인 혐의로 기소된 권씨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하고, 200시간의 사회봉사를 명령했다. 수술을 진행한 병원장 윤모씨(81)에게는 징역 6년과 벌금 150만원을 선고하고 범죄수익 약 11억5000만원을 추징했다. 집도의 심모씨(62)에게는 징역 4년을 선고했다. 이들 3명에겐 아동 관련 기관에 5년간 취업을 제한하는 명령도 내렸다. 환자를 소개하고 알선비를 챙긴 브로커 한모씨는 징역 1년, 배모씨는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권씨는 2024년 6월 유튜브에 ‘총 수술 비용 900만원, 지옥 같던 120시간’이란 제목의 영상을 올렸다. 이후 보건복지부가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수사 결과 윤씨와 심씨는 임신 34~36주차인 권씨에 대해 제왕절개 수술을 해 태아를 출산하게 한 뒤 냉동고에 넣어 살해한 것으로 나타났다. 윤씨는 권씨의 진료기록부에 ‘출혈 및 복통 있음’이라고 적어 사산한 것처럼 허위 내용을 기재하고, 허위 진단서를 발급한 혐의도 받았다.
권씨 측은 “낙태 수술이 배 안에서 태아를 사산시켜 나오게 하는 것인 줄 알았다”며 범행의 고의가 없었다고 주장했으나,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권씨가 태아 심박수가 정상인 것을 알고 있었던 점, 사체 처리에 동의한다는 서류에 서명한 점, 어떤 과정을 거쳐 사산했는지 관심 갖지 않은 점 등을 들어 미필적 살인의 고의가 있었다고 봤다.
권씨 측은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수년째 입법이 되지 않아 제대로 된 의료 조치와 법적 보호를 받지 못했다고도 했다. 이에 재판부는 “수술 당시 태아가 인공 배출돼 살아있는 사람이 된 이상 낙태죄가 아닌 살인죄를 적용하는 것이 맞다”고 했다. 또 “피고인은 유튜브 구독자를 늘려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살해 과정을 담은 유튜브를 올렸고, 우리 사회는 큰 충격을 받았다”면서 “절대적 가치인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범행은 피해 회복이 불가능하며 어떤 이유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헌재의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입법 공백에 따른 혼란 등은 범행에 이르게 된 경위와 관련해 참작할 여지가 있다고 봤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1999년생 미혼 여성이고 임신 말기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소득과 재산이 없었으며 오랜 기간 가족들과 연락하지 않고,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남성과 교제하는 것 외에 사회적 유대관계가 없었다”면서 “임신·출산·육아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고, 어머니가 될 자신뿐 아니라 자녀마저 불행해질 거라고 판단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이어 “피고인이 전문가로부터 충분한 정보를 받고 정신적 지지를 얻으며, 국가가 임신 등 과정에서 장애가 되는 사회·경제적 조건을 개선했다면 다른 결과가 나타났을 것”이라면서 “피고인의 결정이 비록 살해로 이어졌으나 제반 사정을 보면 무작정 비난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선고 이후 권씨 측 김명선 변호사는 “살인 고의는 없다는 객관적 증거는 충분했는데, 내심의 의사에 대한 추측에 기댄 판결이라 매우 아쉽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