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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책보다 헌책인 경우

입력 2026.03.09 20:09

수정 2026.03.09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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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고 있던 책을 대거 처분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사할 때마다 책은 정말 애물단지다. 한 권에 500g이라고 잡아도, 큰 책장 하나를 채울 양만 넘겨도 책은 1t 트럭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가 되고 만다. 그렇다고 책더미를 미련 없이 버릴 수 있으면 이런 지경에 이르지 않는다. 집도 땅도 없는 주제에 굳이 책을 소장하는 미련한 사람들에게 자기가 좋아하는 책과 종이 쓰레기 사이에는 심리적으로 굳건한 관문이 존재한다. 쓰레기가 되지 않도록 모셔두고 싶고, 정 안 되면 새 주인이라도 찾아주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미련스럽게 미적미적 중고 판매 목록을 만들고 있자니 샛길로 빠지고 상념에 빠지게 되었다. 책도 상품인데, 헌책이 새 책보다 좋을 게 대체 뭘까.

‘사용감’ 많은 책과 불편한 만남을 갖는 경험이라 하면 도서관이 생각난다. 그곳엔 도서관 장서를 자기 물건처럼 쓰는 무례한 사람들의 역사가 축적되어 있다. 펜으로 밑줄을 죽죽 그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누군지는 몰라도 꼭 연필도 아니고 펜으로 강렬하게, 삐뚤빼뚤 못생긴 모양으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자리에 쓸데없이 줄을 긋는다. 그래도 언제부턴가 조금 흥미로운 점을 찾았다. 열성적으로 밑줄을 치는 사람일수록 빨리 나가떨어진다는 점이다. 혹시 너무 수고스러운 호들갑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는 걸까. 이것도 나름 교육적 효과일까. 어쨌든 이번 사람은 어디까지 했을지 지켜보겠다는 마음을 품고 나니 밑줄이 덜 거슬리게 됐다.

달리 말하면 내가 읽는 책에 무람없이 등장하는 타인의 흔적을 약간 귀여워하게 됐다. 강아지 귀에는 훨씬 좋은 경험이 많다. 개의 귀(Dog-ear)는 책장 귀퉁이를 살짝 접어서 표시하는 방법을 말한다. 아마 독서가들 사이에서도 취향이 갈리는 지점일 듯하다. 자기 책이든 남의 책이든 육체를 온존해야 한다는 무리와 시선이 닿는 대로 키스마크처럼 자국을 남기며 사는 무리가 나뉘기 때문이다. 나는 책을 깨끗하게 보는 편이지만 은밀한 만남을 몇번 즐긴 이후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 한번은 도서관 책을 보다가 좋았던 구절에 표시하려고 독서용 플래그를 집었을 때였다. 페이지 귀퉁이에 접혔던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같은 공간을 통해서 같은 책을 골랐던 사람이 있고, 내가 감탄한 부분을 다른 사람도 인상적으로 읽었다는 증거이다.

아마존에서 서비스하는 킨들 전자책은 밑줄을 치면 그 자리에 몇명이 밑줄을 쳤는지 알려준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같은 책을 골라서 같은 문장에 반응한 사람들이다. 요즘 교환독서 유행은 하나의 책을 시차를 두고 읽으며 친구가 남긴 코멘트를 확인하는 재미로 이루어지는 중이다. 생각해 보면 나는 어릴 적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빌린 책으로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 사람은 오탈자에 정정 표시를 하고 간혹 짧은 단상을 적어두었다. 덕분에 갑자기 개인적인 방에 초대된 것처럼 특별한 느낌을 받았다. 책의 공유가 언제나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더라도 때때로 예상치 못한 친밀함을 선사하기는 한다. 이런 생각을 한다고 책의 무게가 조금이라도 줄어드는 건 아니지만…… 책을 선뜻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설명해준다. 나는, 혹은 우리는, 책을 같이 읽을 사람을 향한 기대를 떨치지 못하는 것이다.

심완선 SF평론가

심완선 SF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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