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는 버스가 오지 않습니다.”
얼마 전 견학 갔던 한 요양원 건물 입구 옆에 작은 버스정류장이 하나 있었다. 처음에는 요양원 면회객들이 이용하는 정류장인가 생각했다. 그래서 버스가 얼마나 자주 오느냐고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곳은 치매 노인들을 위해 마련된 이른바 ‘가짜 버스정류장’이었다. 이 작은 공간에는 치매 돌봄의 깊은 통찰이 담겨 있다. 치매가 진행되면 많은 환자들이 목적 없이 배회하는 증상을 보인다. 이때 직원들은 환자를 나무라는 대신 “저기 버스정류장이 있으니 잠시 기다려 보시겠어요?”라며 정류장으로 안내한다. 벤치에 앉아 잠시 기다리는 동안 마음은 조금 가라앉는다. 그리고 잠시 후 “버스가 조금 늦어지는 것 같으니 안에서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라고 하면 많은 환자가 자연스럽게 시설 안으로 돌아온다고 한다.
이 아이디어는 독일 뒤셀도르프의 한 요양시설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배회하는 치매 노인들이 대부분 버스나 전철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려 한다는 점에 착안해 요양원 앞에 ‘버스가 오지 않는 정류장’을 설치한 것이다. 이 사례가 알려지면서 유럽과 일본의 여러 요양시설에서 비슷한 정류장을 만들기 시작했다.
치매 환자에게 이 정류장이 효과적인 이유는 기억의 특성과도 관련이 있다. 치매가 진행되면 단기 기억은 크게 약화되지만 젊은 시절의 습관이나 생활 경험 같은 장기 기억은 비교적 오래 남는다. 버스정류장 표지판을 보면 “버스를 타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오래된 생활 경험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그래서 이 정류장은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라 익숙한 과거의 삶과 연결되는 회상 공간이 된다.
실제로 치매 환자의 약 40%는 목적이 분명하지 않은 배회 행동을 보이는 것으로 보고된다. 병동이나 시설 안팎을 계속 돌아다니는 이러한 행동은 환자 본인에게도 위험하고 돌봄 제공자에게도 큰 부담이 된다. 해외뿐 아니라 최근 국내에서도 비슷한 시도가 시작됐다. 충주의 한 노인전문병원 치매 병동에는 지금은 쓰이지 않는 옛 버스 노선도를 붙인 ‘가짜 버스정류장’이 설치되었다. 배회 증상이 나타난 환자들을 정류장으로 안내해 잠시 앉아 쉬게 하며 불안과 초조를 완화하려는 것이다. 의료진은 환자가 정류장에서 안정감을 되찾으면 약물에 의존하기보다 심리 상태를 관찰하고 상담하는 방식으로 돌봄을 이어간다고 한다. 이러한 접근이 과도한 향정신성 약물 사용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노년심리학 연구에서도 익숙한 환경과 과거의 기억을 활용하는 ‘회상 기반 환경’이 치매 환자의 정서 안정과 행동 문제 완화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보고가 있다. 가짜 버스정류장은 바로 이러한 접근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물론 이런 장치를 두고 윤리적 질문도 제기된다. 실제로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게 하는 행위가 환자를 기만하는 것은 아닌지, 버스를 기다리는 환자에게 사회적 낙인이 생기지는 않을지에 대한 우려다. 이를 단순히 ‘착한 거짓말’로만 치부하기엔 윤리적 고민이 따른다. 그러나 치매 돌봄의 핵심은 환자를 억지로 현실로 끌어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잠시 그들의 세계로 들어가는 데 있다. 기억은 흐려질 수 있지만 감정은 오래 남는다. 설령 버스가 오지 않더라도, 누군가가 나를 이해하고 나의 세계를 존중해 준다는 느낌은 환자의 존엄을 지탱하는 힘이 된다.
버스는 오지 않는다. 버스정류장은 가짜지만 그 공간이 품은 온기는 진짜다. 초조하게 집을 찾던 치매 환자가 버스정류장 벤치에 앉아 평온을 되찾는 순간, 가짜 정류장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쉼터가 된다. 버스가 오지 않아도 괜찮다. 그곳에서는 마음이 잠시 쉴 수 있기 때문이다.
김기연 중앙대 심리학과 교수